[金과장 & 李대리] 과장 땐 "아부는 못해" … 팀장 되더니 "사장님이 최고"
만년 과장 김 과장이 팀장으로 승진했다. 그것도 임원들이 맡는 전략기획팀장으로 말이다. 팀원들은 20여명.이들을 이끌고 회사의 장단기 전략을 짜는 게 김 팀장의 업무다.

팀장이 되니 모든 게 달라졌다. 팀원들은 결재를 받으려고 줄을 선다. 잘못을 지적하면 "시정해서 다시 보고하겠습니다"는 답이 튀어나온다. 회의시간에도 마음이 편하다. 팀원들의 얘기를 듣다가 "그런 아이디어로 어떻게 회사를 이끌겠느냐"고 한마디하면 어쩔 줄 몰라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김 팀장은 깜짝 놀랐다. 과장 시절 그렇게 싫어하던 옛 상사의 모습을 닮아가는 게 아닌가. 뿐만 아니다. 과장 때는 느끼지 못하던 스트레스도 많아졌다. 최종 결정을 혼자 내려야 한다. 팀원들의 뒷담화도 적지 않게 신경쓰인다. 사장이나 임원들의 동정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사내정치에서도 비켜날 수 없다.

◆부하 직원은 아이디어 자판기다

김 팀장은 화가 잔뜩 났다. 임원회의에서 프레젠테이션(PT)을 해야 할 날이 코앞에 다가왔다. 팀원들이 만들어온 초안이 맘에 들지 않는다. 몇 번이나 퇴짜를 놓았지만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차 · 과장들을 불러 모았다. "아이디어가 없으면 다른 회사가 어떻게 하는지 커닝이라도 해야 할 것 아냐? " 아무 말도 못하고 차 · 과장들은 흩어진다.

이 차장이 눈치를 힐금 보더니 슬며시 들어왔다. 과장 시절 어울려 다니던 동료다. 지금도 온갖 어려움을 같이 논의하는 사이다. 이 차장은 "저,팀장님"하고 말을 붙인다. "왜?"했더니 "아이디어 자판기라고 기억하세요?"라며 피식 웃는다. 그랬다. 과장시절 팀장은 툭하면 "아이디어를 내라"고 닦달했다. 그럴 때마다 이 차장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우리가 누르면 바로 튀어나오는 아이디어 자판기냐?"며 투덜댔었다.

마음을 다잡은 김 팀장은 스스로 아이디어를 찾는다. 한참 동안 일에 몰두했더니 머리가 띵하다. 기지개를 켜려는 순간 이제 갓 대리를 단 박 대리가 다가온다. "오늘 아버님 생신이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다시 열이 받는다. "지금 몇 시인데 벌써 퇴근하겠다는 말이 나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시계를 보니 오후 7시가 넘었다. 벌써 빈 자리가 눈에 띈다.

씩씩거리는 김 팀장에게 이 차장이 다가왔다. "팀장 눈치보느라 할일 없이 야근하는 걸 죽는 것보다 싫어하셨잖아요?"

◆듣기 좋은 말 하는 부하가 너무 좋다

우여곡절 끝에 PT 원고가 만들어졌다. 최종 검토를 하기 위해 회의실에 모였다. 팀원들을 조진 덕에 만족할 만한 수준이다. 흡족해 하는 김 팀장에게 초짜 과장 하나가 말을 건넨다. "신사업 론칭 시점이 너무 빠릅니다. 해당부서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하는데요. 사실대로 보고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김이 팍 샜다. 하지만 맞는 지적이었다. 아픈 데를 콕 찌른 느낌이었다. 아무 말 못하는 사이 고참 차장이 말을 받았다. "중요한 건 신사업 내용이잖아.론칭 시점은 얼마든지 조절가능하고.우리 팀은 회사의 전체적인 전략을 감안해야 하지 않나요. 그냥 갑시다. "

흐흐,역시 오래 같이 근무한 고참 차장이 최고다. 일단 보고가 중요하다. 그 다음은 나중일이다. "높아지니 입바른 소리하는 놈은 싫다"던 담당 임원의 말이 머리를 스쳐간다. 김 팀장은 결론지었다. "원안대로 갑시다. 책임은 내가 집니다. "

PT는 성공적이었다. "역시 김 팀장을 발탁한 건 잘했단 말이야"라는 사장님의 촌평 한마디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당연히 회식자리가 만들어졌다. 주거니 받거니 거나하게 취했다. 한껏 기분 좋아진 김 팀장이 외쳤다. "2차 가자고.2차는 내가 쏜다. "

호기있게 외치고 노래방으로 옮겼다. 그런데 웬걸.절반이 빠졌다. 어디 갔냐고 물었더니 "집에 일이 있답니다"는 답이 돌아온다. "아니 팀장에게 보고도 안하고…"라며 씩씩거렸지만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다. 이 차장이 "요즘 젊은 애들이 팀장님 주사듣고 싶어하겠습니까? 이해하셔야지요"라며 달랜다.

◆임원에게 야단맞는 걸 부하들은 모르겠지

연말 결산시즌이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 김 팀장,더욱 바빠졌다. 챙겨야 할 것도 많고 보고할 사항도 많다. 아침부터 회의는 왜 그리도 많은지.결재를 받아야 할 거리가 생겼다. 담당 임원은 사소한 오자를 문제삼았다. 평소 같으면 그냥 넘어갈 일이었다. 하지만 심기가 좋지 않았다. "초등학생도 알 만한 단어를 틀리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한참을 혼냈다. "지금 인사철이란 말이야"란 말도 빼놓지 않았다. "잘못했습니다"를 연발하고 돌아온 김 팀장은 부하직원들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사소한 맞춤법 하나 못 맞추면 어떻게 믿고 일하겠느냐?"며 한바탕 해댔다.

잠시 후 화장실을 가는 김 팀장 귀로 부하직원들의 뒷담화가 들렸다. "아니,자기가 과장 시절에는 안 그랬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사소한 것에 연연하는 팀장이 문제있다고 한 사람이 누군데?" "그저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굽실거리는 모양하고는…." 등등.

모른 척 할 수밖에 없었다. 자리로 돌아온 김 팀장에게 팀원 인사고과점수를 빨리 내라는 통지문이 기다린다. 이건 이 차장과도 상의할 수 없는 일.김 팀장은 20여명 팀원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구 하나 낙제점을 줄 수 없다. 하지만 규정은 엄격한 상대평가였다. '팀장하기가 쉽지만은 않구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사내정치판에서 비켜날 수 없다

퇴근 무렵 고교 선배인 상무에게서 전화가 왔다. 별일 없으면 저녁이나 먹잔다. 저녁자리에 갔더니 상무 목소리가 다급하다. 연말 임원인사에서 어찌될지 모르니 좀 도와달라고 했다. "제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라고 되물었더니,"사장께서 총애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자네가 사장직속사단이란 소문이 사내에 파다하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팀장이 되고 나서 피곤한 게 한둘이 아니다. 가장 피곤한 것은 줄세우기다. 학연 · 지연은 물론 과거 근무처에 따라 이런저런 모임이 수두룩하다. 애써 모른 척하지만 뒷말이 많다. 팀장쯤 되면 사내정치를 잘해야 한다는 선배들의 충고도 잇따른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선배 한 분이 보자더니 "행동거지 조심하라"고 조언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사장 눈밖에 난 임원과 자네가 친하다는 얘기가 나돈다"는 거였다. 김 팀장은 웃고 말았지만,이 차장과 어울려 뒷담화를 늘어놓던 과장 시절이 좋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영춘/이관우/김동윤/강유현/이상은 기자 hayoung@hankyung.com


▼이 기사는'김과장&이대리' 연재 2주년을 맞아 김 과장과 이 대리를 김 팀장과 이 차장으로 승진시켜 윗사람의 눈으로 김 과장,이 대리를 보게 하자는 취지에서 작성됐습니다. 실제 사례를 모아 김 팀장이 체험한 것으로 각색했습니다. 다음 회부터 김 팀장과 이 차장은 다시 김 과장과 이 대리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