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설 채권단이 현대건설 인수 우선협상대상자인 현대그룹에 대해 자금출처 서류를 제출할 것을 강도높게 요구했다. 정책금융공사에 이어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도 1일 "현대그룹이 관련 자료를 제출하지 않거나 자금 조달에 불법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양해각서(MOU)를 해지하겠다"고 밝혔다. 정책금융공사는 "현대그룹 컨소시엄에 참여한 동양종금증권의 투자조건에 대해서도 금융당국이 조사해 달라"며 동양종금 투자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따라 현대그룹은 채권단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우선협상자 자격을 박탈당할 위기에 몰렸다.

◆외환은행,현대그룹 압박에 가세

외환은행은 이날 서울 명동 본점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지난달 30일 현대그룹에 프랑스 나티시스은행 대출계약서 및 부속 서류를 오는 7일까지 제출하라는 공문을 발송했다"고 밝혔다. 김효상 여신관리본부장은 "이날까지 자료를 내지 않거나 내용이 미흡하면 5영업일의 시한을 다시 줄 것"이라며 "하지만 현대그룹이 자료 제출 요구에 불응하거나 자금 조달에 불법성이 있다고 판단하면 주주협의회의 80% 이상 동의를 거쳐 MOU를 해지하겠다"고 강조했다.

외환은행은 지난달 29일 현대그룹과 MOU를 체결하면서 이달 6일까지 자료 제출을 요구하려 했지만 현대그룹에 공문을 보내는 날짜가 하루 늦어져 제출 시한도 7일로 늦췄다. 김 본부장은 "자료 제출 기한에 대해 MOU상에는 합리적인 범위 내로 명시돼 있지만 자료를 추가로 요청할 때는 5영업일 이내에 제출해야 한다고 돼 있다"고 말했다.

김 본부장은 "예단할 수는 없지만 현대그룹이 제출한 자료가 미흡하다고 판단되면 예비협상대상자인 현대자동차그룹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자금 출처 문제로 계약이 성사되지 못하면 현대그룹이 낸 현대건설 인수이행보증금 2755억원(입찰금액의 5%)도 돌려줄 수 없다고 밝혔다.

현대그룹과의 MOU 체결을 주도했던 외환은행이 현대그룹에 대한 압박에 가세한 것은 외환은행 단독으로 현대그룹과 MOU를 맺은 데 대해 비난이 일고 있는 데다,현대차그룹이 소송을 제기하는 등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어서다.

이와 관련,현대차그룹은 이날 주거래은행인 외환은행에서 상당한 규모의 예금을 인출해간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 관계자는 "통상적인 금융거래였을 뿐 다른 의미는 없다"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정책금융공사,동양종금 투자도 의혹

정책금융공사는 현대그룹 자금 출처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며 압박 수위를 높였다. 공사는 이날 보도자료에서 "현대그룹 컨소시엄에 재무적 투자자로 참여하고 있는 동양종금의 투자조건에 대해 세 가지 의혹이 있다"고 밝혔다. 동양종금은 현대그룹에 8000억원을 대출해주는 약정을 맺었다.

공사는 "만약 동양종금이 요구한 인수금액의 상한선이 현대그룹이 제시한 입찰금액보다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현대그룹이 이를 위반해 금액을 자의적으로 높였다면 투자자 지위가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동양종금이 8000억원을 투자하면서 입찰일까지 풋백옵션을 확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인수합병 관행상 납득하기 어렵다"며 "만약 입찰 이후에 풋백옵션을 정했거나 앞으로 투자조건을 정할 계획이라면 지금이라도 내용을 공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현대차,"즉각 재협상 나서라"

현대차그룹은 현대그룹 자금 출처에 대한 의혹이 쏟아진 만큼 채권단이 즉각 현대그룹과의 MOU를 해지하고 재협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밝혔다. 현대차는 이날 '외환은행 기자간담회 관련 현대차 입장'을 통해 "더이상의 혼란과 분쟁을 막기 위해 예비협상자인 현대차그룹과 협상을 진행해야 한다"며 "상대방이 계약상 의무를 거부하면 바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법조항과 대법원 판례에 비춰볼 때 자금 출처 등 필요서류 제출에 유예기간을 두는 것은 외환은행의 전횡"이라고 강조했다.

현대차는 "외환은행이 채권단 협의 없이 단독으로 MOU를 체결한 데다 자문기관에 불과한 법무법인 변호사가 서명한 것은 직무유기이자 위법"이라며 "현대그룹의 MOU는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덧붙였다.

현대그룹은 채권단이 전방위 압박에 나서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대출계약서와 부속서류 제출 여부에 대해선 결정하지 못했다. 그룹 측은 "MOU에 근거해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 채권단이 요구하는 추가 해명 및 증빙 서류 요구에 성실히 응하겠다"는 기존 입장만 재확인했다.

현대그룹이 실제로 자금 출처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대출계약서를 채권단에 넘겨줄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논란이 확산돼 왔지만,정작 대출계약서 제출만은 피해왔기 때문이다. 그룹 관계자는 "구체적인 대출 조건을 낱낱이 밝히지 않아도 불법성이 없다는 소명은 가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양종금 투자와 관련해선,"현재로선 동양종금과의 투자 계약에 풋백옵션 조항이 없다"며 "유재한 정책공사 사장은 근거없는 의혹제기를 중단하라"고 말했다. 현대그룹은 이날 현대차그룹을 상대로 '이의제기 금지 가처분' 신청을 서울중앙지법에 추가로 내겠다고 밝혔다.

조재길/이태훈/장창민 기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