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참가국 성적은 선수들의 테크닉을 보면 대강 짐작할 수 있다. 드리블한 공이 발에서 3m 이내이면 16강 실력이다. 2m 안쪽이면 8강,1m이면 4강에 들 수 있다. 리오넬 메시가 대단한 것은 공이 발에서 50㎝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공을 잡아 두세 번 몰다 패스하면 16강이 한계다. 공을 받고 나서 패스하면 8강,원 터치 패스면 4강에 든다. 작은 차이가 좀체 오르기 힘든 벽을 만든다.

한국 증시의 시가총액(9월 말 9876억달러)은 세계 17위다. 아직 16강에 못 들었다. 그럼에도 세계 1등인 종목이 있다. 작년 31억 계약이 거래된 파생상품시장이다. 특히 지수옵션은 한국거래소가 대놓고 자랑하는 상품이다. 옵션 원조인 유럽파생상품거래소(Eurex),시카고상업거래소(CME)도 거래소의 발 밑이다. 반에서 17등 하는 학생이 가장 어려운 과목에서 유독 1등인 셈이다.

여기에서 사단이 났다. 주요 20개국(G20) 정상들이 건배하던 날 2조원이 넘는 차익거래 매물 폭탄이 쏟아졌다. 코스피지수가 10분 사이 50포인트나 빠졌다. 충격은 북한의 기습 포격 못지않았다. 매물 폭탄에 부상자가 속출했다. 개중에는 목숨이 위태로운 중상자도 있다. 확인된 피해액만 1500억원이 넘는다.

금융위원회는 금융감독원 한국거래소와 급히 합동조사단을 구성했다. 범인이 들어온 경로(도이체방크 런던법인)는 파악했다. 하지만 누가 했는지조차 아리송하다. 범행 동기,수법,장물 규모 모두 오리무중이다. 조사에 최소 석 달이 걸린다. 그것도 대부분 해외에 나가 들여다봐야 한다. '11 · 11 옵션테러' 수사는 여기서 막혀 있다.

금융당국이 범행 전모를 밝혀낼 것으로 믿는 전문가는 별로 없다. 통합계좌로 뒤섞고 스와프거래로 꼬아놓았기 때문이다. G20 서울 비즈니스서밋에 온 요제프 아커만 도이체방크 회장은 "고객 계좌였다"고만 언급했다. 그를 만나본 증권계 인사의 전언이다. 범인이 베일에 싸인 헤지펀드라면 자칫 영구미제 사건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재발 방지를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옵션테러의 이면에는 제도의 허점,국회의 단견에다 거래소의 덩치 지상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이런 문제가 개선되지 않고선 12월9일 쿼드러플 위칭데이(선물 · 옵션 동시만기일)에 투자자들은 피난이라도 가야 할 판이다.

옵션시장은 만기일 막판 10분에 손익이 판가름난다. 파생거래 10대 국가 중 이런 제도는 한국뿐이다. 국회가 공모펀드에 거래세를 물리자 기관들이 옵션시장을 떠났다. 세수효과는 거의 없이 외국인에게 노마크 찬스를 준 꼴이다.

덩치 콤플렉스에 빠진 거래소는 '1등 파생시장'에 고무돼 고위험 상품을 속속 들여왔다. 5년 만에 세계 2위로 커진 주식워런트증권(ELW)이 대표적이다. 하루 거래가 2조원 안팎에 달한다. 개인들 주머니를 터는 구조는 옵션과 다를 바 없다.

지난달엔 선물 · 옵션 증거금을 낮춰 판돈까지 줄여줬다. '세계 1등'에 취해 제 실력을 모르고 판만 키우는 꼴이다. 그 결과 몸통(현물시장)의 5배에 달하는 기형적인 꼬리(파생시장)가 탄생했다.

한국 축구는 1954년 월드컵에 처음 나간 지 32년이 지난 1986년에야 첫 골을 넣었다. 원정 16강은 그로부터 24년이 흐른 2010년에야 가능했다. 한국거래소는 1956년 설립됐다. 16강을 코앞에 둔 모양새가 이래저래 한국 축구를 닮았다. 증시의 세계화는 덩치만 키운다고 되는 게 아니다. 시장의 균형있는 성장이 바로 거래소가 갖춰야 할 실력이다.

오형규 증권부장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