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실을 개편하고 젊고 국제감각이 있는 40대 임원을 팀장(사장급)으로 발탁하라."

1993년 가을 이건희 삼성 회장이 받아든 '신경영 추진을 위한 경영방침'이라는 보고서의 핵심 내용이다. 이 회장은 권유를 받아들여 핵심인 비서실장 자리에 감사원 출신의 젊은 사장 현명관을 발탁했다. 파격이었다. 그리고 대대적인 물갈이 인사가 이어졌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2010년 11월.삼성에는 또다시 변화의 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이 회장을 도와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시킨 1등 공신 이학수 삼성전자 고문과 김인주 상담역이 사실상 물러났다. 올 연말 사장단 인사에 앞선 정지작업이라는 점에서 인사 시기와 폭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 회장 취임 23주년 전후 대변화 예고

이 고문은 지난 14년간 삼성의 핵심에 있었다. 2008년 4월 삼성 특검과 경영 쇄신으로 전략기획실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의 영향력은 적지 않았다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

이 회장은 그러나 때가 됐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을 중심으로 한 후계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시급한 상황에서 이 고문의 영향력은 자칫 '젊은 삼성'을 위한 인사를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본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사장단 인사를 앞두고 과거 전략기획실 출신 인물들을 물러나게 한 이유로 꼽힌다.

한발 더 나아가 삼성은 "앞으로 오래된 전략기획실 팀장도 교체할 것"이라고 말해 추가 인사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오랜 기간 이 고문과 호흡을 맞춰 그룹을 운영해온 경영진이 건재하면 젊고 새로운 인사를 발탁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한 인사는 이르면 이달 말 중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래야 12월 초 사장단 인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사폭을 더 크게 하고 싶다"는 이 회장의 발언과 맞물려 올해 사장단 인사폭이 예년에 볼 수 없었던 수준으로 이뤄질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많다.

12월1일은 이 회장이 호암 이병철 선대회장 타계 후 그룹 대권을 승계한 취임 23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을 전후해 삼성의 커다란 변화가 정점을 이룰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된다.

◆"사장단 얼마나 젊어질까" 주목

현재 삼성 사장단의 평균 연령은 53.7세다. 하지만 올해 사장으로 승진할 이재용 부사장(42)과의 차이는 여전히 크다. 이 회장이 조직은 젊어져야 한다고 말한 만큼 12월 사장단 인사에서 과거 그의 전성기를 함께했던 상당수 원로 사장들의 퇴임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전략기획실 출신 사장들의 거취도 관심이다. 현재 삼성그룹 사장단 가운데 상당수가 전략기획실 출신이다. 이 회장이 이들 대부분이 이 고문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 판단했다면 인사폭은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는 추측도 있다. 기술과 글로벌 경쟁구도의 변화를 이해하고 감지하는 능력을 갖춘 현장 출신 인사들이 주목받는 이유다. 실제 세계 최고의 정보기술(IT) 기업으로 등극하는 동안 삼성전자의 최고경영자(CEO) 대부분이 공대 출신이었다는 점을 이 회장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재용 부사장의 인맥도 중용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동안 이 부사장의 인맥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이번 인사를 통해 수면위로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계열분리 사전작업도 관심

이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하면 어떤 역할을 맡을지는 삼성 내부에서도 전망이 분분하다. 반도체,LCD(액정표시장치),신사업 가운데 하나를 맡을 것이라는 얘기부터 삼성전자 대표이사로 곧장 오를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반도체는 이 회장이 세계 최고에 올려놓은 사업인 만큼 이를 승계한다는 상징성이 높다. LCD사업은 그가 소니와의 합작사인 S-LCD 등기이사를 지냈다는 점 때문에 얘기가 나오고 있다.

또 신사업을 직접 진두지휘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도 나온다. 삼성이 신수종사업으로 선정한 LED(발광다이오드),태양전지,자동차전지,바이오제약,의료기기 등이 모두 삼성전자와 관련 있는 사업들이기 때문에 그가 이들 사업을 맡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삼성전자는 삼성LED 지분 50%를 갖고 있고 태양전지,바이오,의료기기 등은 전자가 독자적으로 또는 의료원과 함께 추진하고 있는 사업들이다. 이 중 일부는 이미 검증된 성장사업이기 때문에 위험부담도 덜하다.

이 회장의 두 딸인 이부진 호텔신라 전무와 이서현 제일모직 전무의 승진과 이들이 맡고 있는 계열사 사장단 인사도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이번 인사가 향후 계열분리의 시발점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