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새 국면 접어드는 글로벌 환율전쟁
기축통화국의 필요조건은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다. 상품과 돈은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결제 통화를 세계 시장에 꾸준히 공급하려면 세계 시장에 내다파는 물건보다 사들이는 물건이 꾸준히 더 많아야 한다. 기축통화량은 세계 경제가 성장하는 것에 맞춰 늘어나야 하기 때문에 기축통화국은 구조적인 경상수지 적자를 견딜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해야 한다.

그 역할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60여년간 미국이 해왔다. 금을 대신하는 기축통화로 달러를 공급했고,신흥국에 소비시장을 제공했다. 덕분에 한국을 포함한 신흥국들이 큰 어려움 없이 세계 경제에 편입돼 성장했다.

그랬던 미국이 2008년 터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소비가 미덕'이라던 미국은 이제 '수출만이 살 길'이라고 외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 1월 국정연설에서 "5년 안에 수출을 두 배로 늘려 200만개의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인플레이션(물가상승)을 유발시켜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양적 완화'는 예전에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엄청난 변화다. 종이 쪽지에 불과한 달러를 전 세계가 믿고 거래한 것은 미국의 강한 달러 정책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중앙은행이 직접 나서 장기 국채를 사들이는 방식으로 700조원에 가까운 돈(6000억달러)을 내년 상반기까지 풀기로 했다.

미국은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가치를 지키기보다는 실업 등 자국 내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통화 팽창을 선택했다. 그러면서 중국 등 신흥국에 통화가치 절상을 요구하고 경상수지 흑자를 줄여야 한다고 압박했다.

지난 11일과 12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정상회의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각국의 입장을 공식 확인했다. 글로벌 환율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해법을 찾지 못했지만 서로의 견해를 공식 확인한 것은 큰 성과다. 내년 상반기까지 경상수지 관리제와 관련된 예시적 가이드라인을 만들고,신흥국에 외국자본 유출입 통제를 인정하는 합의를 이끌어낸 것은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하지만 글로벌 환율전쟁은 이번에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지금까지는 환율과 경상수지 문제를 놓고 다퉜다면 앞으로는 미국 달러를 대체할 기축통화 문제를 놓고 격돌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달러에 대한 불신이 그만큼 깊어졌기 때문이다.

중남미 신흥국의 리더인 브라질과 차기 G20 정상회의 의장국인 프랑스 등은 달러가 아닌 새로운 기축통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프랑스는 내년 2월 G20 재무장관회의 때부터 기축통화 문제를 핵심 의제로 상정할 방침이다. 달러가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할 것인지,유로 엔 위안 등이 기축통화로 함께 참여할 것인지,달러를 대체하는 새로운 시스템이 도입될 것인지를 점치기가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글로벌 환율전쟁이 종착지에 가까워질수록 주요국 간 힘겨루기가 격렬해지고 불확실성도 덩달아 커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제부터 진짜 전쟁이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입장에서는 대외 부문의 불확실성이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G20 정상회의 성공의 논공행상을 따지기보다는 세심하고 정밀한 정책들을 디자인해야 할 때다.

현승윤 경제부장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