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하시는 분 계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올초 일본 도쿄 신주쿠의 올림푸스 본사 회의실.방일석 올림푸스한국 사장(47)은 프레젠테이션을 끝낸 뒤 이사회 멤버들을 둘러봤다. 그의 프레젠테이션 안건은 일본 본사에서조차 하지 않는 내시경을 이용한 기업 이미지 광고를 한국에서 내보내겠다는 것이다. 첫 시도인 만큼 적지 않은 반대를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침묵만이 흘렀을 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회의가 끝난 후 본사 대표인 기쿠가와 쓰요시 사장이 방 사장에게 다가왔다. "자네를 믿겠네."그로부터 한 달여 뒤,올림푸스한국은 전 세계 지사를 통틀어 유일하게 내시경 전파 광고를 시작했다. 병원만을 상대로 하는 B2B 제품인 내시경 광고는 올림푸스에서는 새로운 시도였다.
[CEO & 매니지먼트] 한 번의 프레젠테이션으로 '제2의 인생' 10년 만에 올림푸스 '모범 CEO'로
◆"자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나"

국내 시장에 진출한 외국계 회사 최고경영자(CEO)들이 방 사장을 만나면 늘 던지는 질문이 있다. "어떻게 그런 권한을 갖는가"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외국계 기업의 현지 법인은 대부분의 업무를 본사의 지휘에 따라 움직인다. "동전 하나라도 쓰려면 본사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푸념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이 회사에선 다르다. 국내에서 벌어들인 돈은 모두 국내 시장에 재투자한다. 2000년 10월 설립한 올림푸스한국의 지난 10년간 배당성향은 2.7%에 불과하다. 가령 100만원을 벌어들였을 때 본사에 배당으로 보내는 과실송금액은 2만7000원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본사에 대한 보고 체계 또한 '특수 케이스'에 해당한다. 다른 해외 지사들은 카메라 사업의 현황을 본사 카메라 사업본부에 보고하지만,올림푸스한국은 지주회사 소속으로 움직인다. 방 사장이 의사결정 과정을 기쿠가와 본사 사장에게 직보하는 방식이다. 사옥 지하엔 임직원들이 클래식 공연을 볼 수 있도록 400억원을 들여 지은 전문 공연장까지 있다. 이것 또한 본사엔 없는 것이다. 방 사장은 올림푸스 전체 해외 법인장 중에서 신사업과 투자,독자적인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재량권을 갖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쪽방 사무실에서 강남 신사옥까지

기쿠가와 본사 사장이 그를 전폭적으로 신임하는 데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이야기는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에서 일하던 그는 일본에 주재원으로 나간다. 당시 올림푸스는 그의 고객사로,세계 디지털카메라 시장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올림푸스 기획실에서 그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한국시장에 진출하고 싶은데 시장 트렌드를 알아봐 줄 수 있겠나?"그는 그 길로 달려가 리포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뒤,본사 경영진을 앞에 두고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그 한 번의 프레젠테이션이 그의 인생을 바꿔 놨다. 설명을 듣던 임원들이 그에게 "한국 사업을 맡아줄 수 있겠느냐"며 스카우트 제의를 해 왔다. 의외의 제의에 머뭇거리다 그는 한 가지 제안을 한다. "한국법인을 세워 성공시킬 테니 대신 한국에서 벌어들인 돈을 한국에 재투자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마음을 정한 그는 곧바로 귀국해 쪽방 사무실을 얻었다. 야전침대에서 먹고 자며 2000년 10월1일 회사를 세웠다. 전지현씨를 모델로 한 '마이 디지털 스토리'광고가 '대박'을 터뜨리며 국내에서 디지털카메라 붐이 일었다. 매출은 승승장구했고,방 사장은 올초 강남 선릉역 인근에 '올림푸스한국'사옥을 세울 수 있게 됐다.

◆한국발 글로벌 의료기기 사업을 꿈꾼다

올 4월 방 사장은 처음으로 직원들 앞에서 눈물을 뿌렸다. 직원들이 출장길에서 돌아오는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신사옥 앞에서 '꽃다발'이벤트를 한 것.방 사장은 북받치는 감정에 이렇게 울먹였다. "10년 전에 사옥을 짓겠다고 말했을 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나 스스로도 '내가 여기서 성공할 수 있을까'란 질문을 많이 던졌다. 그간 입 밖에 내지 못했지만 그 숱한 맘 고생 끝에 '이제 약속은 지키게 됐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

그는 사무실로 올라가자마자 새 목표 실행에 들어갔다. 그가 세운 계획은 한국을 올림푸스 의료기 사업의 새로운 허브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올림푸스는 세계 내시경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의료기기 분야의 강자다. 1919년 일본 최초의 현미경 회사로 출발, 1950년 세계 최초로 위 내시경 카메라를 만들었다. 의료기기 분야에서 강점을 갖고 있는 올림푸스의 역량에 한국의 정보기술(IT)을 결합하면 '일을 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방 사장은 본사로 달려가 경영진 앞에 섰다. "수천억원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발(發) 의료기기 사업을 일궈 세계 시장에 진출하겠다"란 계획을 발표했다. 본사 사장단은 이런 그의 계획에 힘을 보태줬다. 올림푸스한국은 기업 인수 · 합병(M&A)을 포함한 다양한 각도에서 의료기기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난 '엉뚱한'사장님

방 사장에게 스마트폰은 분신과 같은 존재다. 400여명의 임직원들이 매일같이 보내는 이메일을 확인하기 위해선 스마트폰을 한시도 손에서 뗄 수 없다. 그는 4년여 전부터 전 직원들과 이메일을 주고받는 '운동'을 시작했다. 직원들이 반겼을리 만무했겠지만,그의 논리는 뚜렷하다.

방 사장은 "내부의 적이 외부의 적보다 무섭기 때문"이란 말로 이메일 운동을 설명한다. 예컨대 일반 디지털카메라와 렌즈를 바꿔가며 사용하는 일안반사식카메라(DSLR)의 장점을 섞은 하이브리드 카메라 '펜(PEN)'의 마케팅에 들어가려면 전 조직원이 전략을 공유해야 한다. 하지만 영업과 마케팅,홍보 조직이 이를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한다면 내부를 설득하는 데 진을 뺀 탓에 정작 외부 경쟁자와의 전투에서 전력을 다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밥 먹고 자는 시간을 빼면 이메일 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좋은 일도 종종 생긴다. 콜센터 직원들과도 스스럼 없이 안부인사를 주고받을 정도로 직원들과의 담이 낮아졌단다.

드럼 연주에 취미를 갖고 있는 그는 2년 전부터 사내 밴드인 '올-밴(올림푸스 밴드)'의 드러머도 맡고 있다. 활달하고 적극적인 그에게 색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취미도 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목백일홍, 단풍나무,소나무 등을 가꾸는 원예가 그것이다.

"조그마한 것이라도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뭐든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 제 철학입니다. 후배들에게 자랑스러운 '글로벌 올림푸스한국'을 물려주는 게 지금의 저에게 최고의 과제이죠."

김현예 기자 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