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비자카드가 통보해온 한국에 대한 차별적인 수수료 인상 조치와 관련해 심히 유감을 표명합니다. … 저는 오늘 비자카드 고위자문위원회(Senior Advisory Council) 위원직을 사퇴합니다. "

작년 2월18일 발표된 이 사퇴문으로 대한민국 신용카드 역사의 한 획이 그어졌다. 우리의 토종 신용카드 브랜드가 해외에 진출하는 계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1976년 씨티은행에 입행한 이후 은행,보험 등에서 30년 이상 일해온 필자는 2008년 3월 비씨카드 사장으로 취임했다. 곧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나라 신용카드는 비자나 마스터카드 같은 국제 카드사에 의존해야만 해외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자체 글로벌 네트워크가 없기 때문이었다. 국내에서 발급된 카드로 해외에서 100만원어치를 결제하면 이 중 1만원이 국제 카드사로 흘러들어 간다. 국내 카드사는 글로벌 네트워크를 이용한 대가로 해외신용판매금액의 1.0%를 내야 한다. 결국 그 부담은 카드 사용자에게 돌아간다. 물론 수수료 인상 여부도 국제 카드사 몫이다. 더 충격적인 대목은 국내에 신용카드가 도입된 지 30년이 다 되었지만 국제 카드사 눈치 보기에 급급했던 나머지 이처럼 매우 종속적인 구조를 개선하려는 시도조차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런 실정에서 비자카드는 작년 2월8일 "한국의 비씨카드를 포함한 모든 카드사에서 발행된 비자카드의 국제카드 수수료를 2009년 4월1일부터 인상한다"는 내용을 일방적으로 통보해왔다. 은행계 카드사들에 결제망을 제공하는 비씨카드 대표로서 나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수익 중심 정책에 의해 거의 매년 수수료를 올려왔으면서 또 다시 국제카드 수수료 및 분담금을 인상한다는 결정은 비자카드가 아시아의 카드시장 리더인 한국을 경시하는 것이자 상도의를 무시한 처사라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고위자문위원직 사퇴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수수료 인상이라는 중요한 사안이 자문위원들과의 사전협의 없이 결정된 만큼 더이상 이 자리를 유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문위원회는 비자카드가 회원사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만든 조직으로 시장영향력이 높은 국가의 주요 카드사 대표로 구성됐다. 아시아 · 태평양지역에선 3개 국내 카드사가 위원직을 맡고 있었다.

열흘간의 고민 끝에 나는 사퇴 의사를 발표했다. 이에 앞서 며칠 밤을 새웠고,휴일에도 수십 차례 대책회의를 거쳤지만 정면돌파 외엔 대안이 없었다. 비자 브랜드카드 발급도 전면 재검토하기로 했다. 이번 기회에 향후 비씨카드 만으로도 국제카드 수수료 없이 해외에서 카드를 쓸 수 있도록 자체 해외 제휴선을 확충해 나가기로 했다.

지금도 나는 발표문을 작성하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나의 결정으로 인해 우리 회사는 물론 우리나라 신용카드업계에 미칠 악영향을 놓고 걱정이 많았다. 글로벌 카드 네트워크의 60% 이상을 점유하는 비자카드가 세계 최대 신용카드사로서의 지위를 악용한다면 한국 카드업계 전체가 막대한 피해를 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주위에선 모두들 무모한 도전이라고 우려했다. 그렇지만 네티즌들의 응원은 내게 큰 힘이 됐다. "한국 고추의 매운맛을 보여줘라" "비씨카드 파이팅!!" 등과 같은 격려의 댓글이 이어졌다. 어떤 기사에는 5000여개의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결국 비자카드는 나의 사퇴 통보 6시간 만에 긴급회의를 소집하고,한국의 모든 카드사에 적용하기로 한 국제카드 수수료 인상 조치를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광우병 파동으로 반미 정서가 채 가라앉지 않은 시점에서 또 다시 한국 소비자들의 집단 반발을 우려한 영향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비씨카드는 2011년 1월 그동안 열심히 준비해온 우리의 토종브랜드인 '비씨글로벌카드'를 내놓는다. 세계 6위 카드사인 미국 DFS(Discover Financial Service)와의 전략적 제휴가 성사된 덕이 크다. 이 카드를 소지한 고객들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국제카드 수수료 없이 사용할 수 있다. 수수료 절감으로 대한민국은 향후 10년간 약 5000억원에 이르는 국부 유출을 막을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