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달러화가 '미끄럼틀'을 타고 있다. 미 달러화는 일본 엔화에 대해 15년 만의 최저치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스위스프랑에 대해선 사상 최저,호주달러에 대해선 28년 만의 최저다. 유로화에 대해서도 9개월 만의 최저 수준까지 내려갔다.

지지부진한 미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조만간 추가로 돈을 더 푸는,'양적완화' 조치에 나설 것이 확실시 되기 때문이다. FRB가 돈을 풀어 시장에 미 달러화 공급이 늘어나면 일반적으로 달러 가치는 떨어진다. "FRB의 (추가 양적완화) 목적이 달러 약세를 겨냥한 것은 아닐지라도 분명히 달러 약세의 원인"(울리히 로이히트만 코메르츠방크 외환시장분석 책임자)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미 달러화 한때 81엔 밑돌아

외신들에 따르면 미 달러화는 14일(현지시간) 런던외환시장에서 한때 달러당 80.87엔까지 내려갔다. 일시적이었지만 81엔대가 깨졌다. 미 달러화는 이날 스위스프랑에 대해선 사상 최저(달러당 0.9461스위스프랑),호주달러에 대해선 28년 만에 최저치(호주달러당 0.9993달러)까지 떨어졌다. 유로화에 대해서도 유로당 1.4121달러로 떨어지며 지난 1월26일 이후 최저치를 나타냈다. 이날 싱가포르 정부가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환율변동폭을 확대,사실상 싱가포르달러의 평가절상을 용인키로 한 것도 달러 약세를 부추겼다.

경제 회복을 위해 수출을 늘리고 일자리를 창출해야 하는 미국 입장에선 약(藥)이다. 그러나 기축통화인 미 달러의 급격한 가치 하락은 글로벌 경제의 안정성을 해치고 결국엔 미국에도 독(毒)이 될 것이란 경고가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익명을 요구한 유럽의 한 정책 당국자는 "FRB의 추가 양적완화는 교역 경쟁국들을 희생시켜 미국의 수출경쟁력을 높이는 것이기 때문에 무책임하다"고 지적했다. 사이먼 데릭 BNY멜런 수석외환투자전략가는 "단기적으로 미국이 '환율전쟁'에서 승리하겠지만 이는 결국 중국과 일본 유럽 등 다른 큰 경제국들에 타격을 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은 유로화에 대한 달러화 가치가 2년 전 최저점일 때에 비해 13%가량 높은 상태지만 FRB의 양적완화 정책이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달러화 가치는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최근 외환시장의 변동성을 크게 만드는 것이 미국 책임이라는 직접적인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알렉세이 쿠드린 러시아 재무장관은 "최근 외환시장이 요동치는 것은 일부 선진국,특히 미국이 자국의 구조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통화완화 정책을 쓰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로렌조 비니 스마기 유럽중앙은행(ECB) 정책이사도 "최근 외환시장은 유로나 엔 강세가 아니라 달러 약세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미 · 중 환율 공방은 여전

미 달러화가 약세를 보이는 와중에도 글로벌 환율전쟁의 핵심에 놓여 있는 미국과 중국 간 공방은 한치의 양보 없이 진행되고 있다. 달러 약세 여파로 중국의 위안화 가치도 최근 오름세를 보이고 있긴 하다. 중국 인민은행은 15일 달러 · 위안 환율을 전날보다 0.0085위안 하락한 6.6497위안으로 공시했다. 이달 들어 5번째 사상 최저치다. 그러나 다른 나라 통화와 비교하면 위안화 환율 절상폭은 미미하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위안화 가치는 연초와 비교해 미 달러 대비 2.6%가량 올랐다. 반면 엔화는 12.8%,호주달러 10.6%,싱가포르달러 8.4%,원화는 4.8% 상승했다. 미국은 빠른 경제 회복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인위적으로 환율을 낮게 유지해 글로벌 무역 불균형을 심화시키고 있다며 전방위로 위안화 절상 압력을 넣고 있다.

특히 미국의 대중국 무역수지 적자 급증은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미국의 8월 대중국 무역수지 적자는 280억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로버트 기브스 백악관 대변인은 이와 관련,"버락 오바마 대통령이나 티모시 가이트너 재무장관 등이 중국 정부에 그들의 의무를 준수하라고 계속 압력을 넣을 것이라는 점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반면 야오젠 중국 상무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단순히 중국의 무역수지 흑자를 들어 위안화 환율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며 "미국이 위안화를 미국 내 문제의 희생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반박했다.

◆신흥국 외환보유액 사상 최대

미국의 달러화 약세와 사실상 연동돼 움직이는 위안화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국 통화 가치가 급등한 신흥국들은 비상이 걸렸다. 브라질 태국 등 투기자금이 몰린 신흥국들은 시장개입과 함께 세금 부과를 통한 자본 유입 억제책을 내놓고 있다. 브라질은 최근 외국인의 채권 투자에 대한 거래세를 2%에서 4%로 올렸고 태국도 외국인에게 15%의 채권보유세를 부과했다.

씨티와 모건스탠리 등 투자은행들은 최근 과도한 해외 자본이 유입될 경우 태국에 이어 한국과 대만 인도 인도네시아 등이 자본 유입을 조절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을 내놨다.

한편 환율 방어를 위해 달러를 사들이면서 신흥국들의 외환보유액은 사상 최대 규모다. 브라질은 지난달부터 하루 두 차례씩 달러화를 매입하면서 외환보유액이 연일 사상 최대치를 기록 중이다. 13일 현재 2800억9600만달러다. 중국과 대만의 외환보유액도 사상 최대다.

박성완 기자 ps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