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서부 도시 뒤셀도르프에서 남쪽으로 30㎞ 떨어진 도마겐 켐파크(Chempark).독일 최대 화학단지로 라인강과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이곳엔 특수화학기업인 랑세스의 연구 · 개발(R&D)센터와 생산라인이 자리잡고 있다. 고성능 타이어 원료로 쓰이는 기능성 부타디엔 고무(PBR) R&D 센터에 들어서니 보안경을 쓴 직원들이 3m 높이의 기계에서 하얀 팝콘처럼 생긴 알갱이를 뽑아내고 있었다. 타이어를 비롯해 신발 골프공 등 다양한 제품의 원료로 쓰이는 합성고무다.

직원들의 눈길은 진지했다. 낯선 사람의 방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알갱이를 뽑아내고 불순물은 없는지 검사하는 데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센터 안엔 기계음 소리를 제외하곤 적막만 흘렀다. 랑세스 관계자는 "근무 시간엔 직원들이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간부들도 조심한다"며 기자에게 연신 목소리를 낮춰 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5% 이익률 넘어야 사업부 존속

랑세스는 1863년 창립한 독일 최대 제약업체인 바이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2005년 바이엘의 화학제품 부문이 분사해 설립됐다. 분사 직전인 2004년 이 사업 부문은 1200만유로의 적자를 냈지만 랑세스는 출범 5년 만에 연간 10%의 이익률을 올리는 알짜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경제위기가 한창이던 지난해 대부분 경쟁업체들이 적자에 허덕이는 상황에서도 랑세스는 영업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현금창출 능력을 뜻하는 EBITDA(법인세 · 이자 · 감가상각비를 빼기 전 이익) 기준으로 이익률 9.2%를 기록했다. 미운 오리 신세에서 화려한 백조로 부활한 것이다. 이런 성과에 힘입어 지난해 랑세스는 세계 화학 전문지인 ICIS로부터 '2009년 최고 화학기업'으로 선정됐다. 전문가들은 과감한 구조조정과 적극적인 해외 진출 전략 등을 신생기업 랑세스의 성공 배경으로 꼽는다.

악셀 하이트만 랑세스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2005년 바이엘에서 분사했을 당시 랑세스가 성공할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토로했다. 바이엘이 랑세스를 분사한 것은 적자투성이에 시달리던 화학 부문을 정리하겠다는 의도였다. 당시 파이낸셜타임스는 랑세스가 독일 증시에 상장된 직후 "수익을 못 내는 기업에 투자하겠다는 사람들이 과연 있을지 의문"이라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랑세스는 살아남기 위해 강력한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분사 당시 18개에 이르던 사업부를 13개로 축소했다. 이익률 5%를 넘지 못하는 종이 섬유제품 등의 사업부를 과감하게 정리했다. 이 같은 방침은 지금도 시행 중이다. 현재 13개 사업부 중 이익률 5%를 넘지 못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마티아스 자커트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핵심사업에만 역량을 집중하는 것도 어렵다"며 "이런 정책 때문에 랑세스는 위기를 헤쳐갈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미리 다져놓은 체질은 2008년 금융위기를 견뎌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금융위기가 닥치자 랑세스는 중앙위기관리팀을 신설해 비용 절감에 주력했다. R&D 분야만을 제외하고 사업 전 부문에 120여개에 달하는 긴축재정 프로그램도 실시했다. 이에 따라 지난 2년 동안 총 2억9000만유로의 비용을 절감했다. 지난해 매출이 전년 대비 23% 급감했지만 EBITDA 이익률은 9.2%로 흑자기조를 이어갈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M&A를 통한 아시아 시장 집중 공략

하이트만 CEO는 기자간담회가 끝난 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기자들을 따로 만날 정도로 아시아 시장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중국 인도 등 아시아 국가를 대상으로 사업에 주력해 왔다"며 "금융위기 후 아시아 국가들의 빠른 경기 회복으로 랑세스가 경제위기를 견뎌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랑세스의 지난해 매출 중 아시아 비중은 약 23%로 독일(17.8%),북미(17.1%) 지역 매출을 훨씬 웃돈다.

올해는 아시아 비중이 30%에 육박할 전망이다. 랑세스는 싱가포르에 4억유로를 투자해 아시아 최대 부틸고무 공장을 건설 중이다. 인도 자가디아주엔 2012년 완공을 목표로 신규 플라스틱 공장을 건설하고 있고,중국 우시의 플라스틱 공장도 확대할 예정이다. 한국에도 신규 공장 건설 등의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

인수 · 합병(M&A)도 랑세스가 아시아 지역에 진출하는 대표적인 전략이다. 랑세스는 주로 중국과 인도에서 중소 규모의 기업들을 대상으로 M&A를 해 왔다. 하이트만 CEO는 "이미 기존 시장에 진출해 있는 기업들을 인수한다면 랑세스의 기술력을 더해 선두지위를 확고히 할 수 있다"고 말했다.

◆R&D 분야는 기업의 핵심 경쟁력

랑세스는 독일의 켐파크뿐만 아니라 중국 브라질 등 모두 6곳에 R&D 센터를 두고 있다. 하이트만 CEO는 기자간담회에서 "우리의 R&D 센터야말로 랑세스의 핵심경쟁력"이라며 "적자에 시달리던 랑세스가 최고 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꾸준히 R&D 분야에 투자한 결과"라고 말했다. 랑세스가 만드는 안료 합성고무 플라스틱 콘크리트 등의 가격은 다소 비싼 편이지만 품질 수준이 높아 판매는 호조를 보여 왔다.

랑세스는 경제위기가 본격화된 2008년 이후에도 계속 R&D 인력을 늘려 왔다. 지난해 기준으로 관련 예산과 인력은 2007년에 비해 25% 증가했다. 지난해 랑세스가 추진한 160개 프로젝트 중 125개가 신기술 개발이었다. 덕분에 지난해 신규 특허 등록 건수는 2007년 대비 4배 증가했다. 같은 기간 동종업체 평균의 1.5배를 웃돈다.

켐파크 안을 둘러보던 중 유독 다른 공장과 외관이 차별화되는 붉은 벽돌 건물이 눈에 띄었다. 랑세스 본사 건물인 'K10'이다. 랑세스 홍보 관계자는 "합성고무 제품 관련 원천기술 대부분이 개발된 곳"이라고 자랑했다. 랑세스의 핵심 R&D 및 품질 테스트 연구소도 여전히 'K10' 내에 있다. 한국타이어를 비롯한 세계 유명 타이어 업체들의 연구인력들은 현재도 이곳에서 정기적인 연수를 받는다.

뒤셀도르프=강경민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