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정부출연연구기관을 대표하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한홍택 원장이 추석 직전에 사표를 냈다. 지난 8월 취임한 뒤 1년을 겨우 넘긴 시점이다. 한 원장 스스로 사표를 냈다기보다 교육과학기술부가 그를 잘랐다(?)는 게 정설이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이유는 조직관리 측면에서의 문제다. 원장실 여비서 채용,그리고 두 번에 걸친 부원장 교체 등으로 직원들과 갈등을 겪었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비서와 관련한 풍문,한 원장의 치매설 등이 들려오기도 했다. 한 원장 자신은 지금은 아무 말도 않겠다고 한다. 문제가 있다면 정부는 국민의 세금을 갖다쓰는 연구기관의 장을 물러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는 그렇게만 생각하고 넘어갈 간단한 사건이 아니다.

KIST는 1966년 설립된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상징과도 같은 기관이다. 현 정부는 KIST를 세계적 연구소로 육성하겠다며 좋은 외국인을 데려오라고 했고,그에 따라 서치 커미티(search committee)가 구성됐다. 서치 커미티는 전 세계로 인물들을 찾아다녔고, 우여곡절 끝에 마지막으로 선택된 사람이 미국 UCLA 석좌교수였던 한국계 미국인 한 원장이다. 기존의 틀을 깬 고액의 연봉,연임을 포함한 임기 보장,거액의 특별연구지원금 등 부대조건이 붙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불과 1년 만에 이 모든 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KIST 내부직원들은 할 말이 많겠지만 밖에서 볼 때는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다. 새 바람을 일으키기는커녕 전혀 딴판이 돼 버린 지금의 상황이 40년도 더 된,한국을 대표하는 KIST의 현실인가를 생각하면 특히 그렇다. KIST가 대내외적으로 받은 상처는 크다. 한 원장 또한 한국 땅에 다시 발을 붙이기 어렵게 됐다. 기관장도,기관도 다 패배자가 된 형국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인가.

다양한 분석들이 나온다. 한 원장이 큰 기관을 이끈 경험이 전혀 없었다는 얘기가 있는가 하면,그가 한국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진단도 있다. 문화적인 차이라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한 원장이 생각하는 리더십과 직원들이 원하는 리더십의 충돌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한 원장과 KIST의 문제라고만 할 수는 없다.

교과부에 묻고 싶다. 해외 석학을 데려와 연구소 경영을 맡긴다고 했을 때 정부는 사전에 얼마나 깊이있게 검토했던 것인가. 정부 말대로 정말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면 서치 커미티는 도대체 무엇을 했다는 것인가. 정부는 국가 연구정책의 방향과 연구소의 임무를 명확히 제시하지 못한 채 그저 '유명한 사람'을 데려다 놓기만 하면 확 바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연구시스템이나 환경이 미국 수준이라고 착각한 것인가. 정부는 외국인이 기관장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얼마나 사후관리를 했는가. 문제가 터졌을 때 초기에 정부가 대응을 잘못해 사태를 키우고,꼬이게 한 건 아닌가. 혹여 여론이 좋을 때는 정부의 공이고,안 좋아지면 기관장을 갈아 치우면 그만이라고 안이하게 생각한 것은 아닌가. 의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현 정부의 세계적인 연구소 육성정책이 이런 식이라면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부는 조사위원회를 구성,이번 사건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정부관계자를 포함해 이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은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한홍택의 실패'로만 몰아가면 한국 과학은 희망이 없다.

안현실 < 논설위원·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