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부평구청 공무원 윤계영씨(42)는 추석 명절인 지난 22일 오전 5시 충남 태안군 안면도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급히 귀경길에 올랐다. 21일 서울 · 인천지역을 두세 시간 만에 물바다로 만든 기습폭우 탓에 작전동 등 관할 지역의 침수피해가 잇달아 전날 밤 긴급 호출명령을 받은 것.맏며느리이지만 윤씨는 차례 상조차 차리지 못한 채 시댁을 나섰다. 인천터미널 도착 즉시 수해 현장으로 달려간 그는 이날 밤을 구청에서 꼬박 새웠다. 윤씨의 남편인 공무원 강천식씨(47 · 인천 만수2동사무소)도 차례와 성묘를 마치자마자 귀경해 출근했다. 그는 "지난 2일 강풍을 동반한 7호 태풍 '곤파스'로 지붕이 날아간 고향집 창고와 비닐하우스를 제대로 고치지 못하고 올라왔다"며 "수해현장 대부분이 반지하 등 소외계층 거주지여서 재난이 아니라 재앙 수준"이라고 말했다.

서울 · 인천 등 수도권을 기습한 지난 21일의 한낮 집중호우는 왜 발생했을까. 이날 내린 비는 1907년 기상(강수) 관측이 시작된 이후 '9월 하순' 서울의 하루 강수량으로는 최고치였다. 그것도 2~3시간 사이에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259.5㎜…역대 9월 강수량 2위

추석 바로 전날 서울에 내린 259.5㎜의 폭우는 한반도 북서쪽의 차가운 대륙 고기압과 남쪽의 북태평양 고기압의 기 싸움으로 형성된 강한 비구름대(정체전선)가 핵심 원인으로 꼽힌다.

이는 서울의 역대 9월 강수량 중 2위에 해당한다. 역대 최고는 1984년 9월1일의 268.2㎜였다. 기상청 관계자는 "북태평양 고기압의 세력이 약해져 정체전선이 남하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동태평양의 라니냐 현상이 심해지면서 북태평양 고기압 세력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며 "제12호 태풍 '말라카스'까지 발생해 북태평양 고기압의 남하를 막는 바람에 비구름대 폭이 수도권 상공으로 바짝 좁혀진 대신 밀도는 더욱 높아져 국지성 폭우로 돌변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이날 대구 제주 목포 등 남부지방엔 최고 33.9도의 폭염이 계속됐다. 폭우와 폭염이 한반도를 동시에 덮쳤다는 얘기다.

실제로 예년에는 9월 하순이면 일본 규슈(九州)지방까지 남쪽으로 물러났을 북태평양 고기압이 올해는 최근까지도 한반도 가까이 머물러 있었다. 동태평양의 적도 부근 수온이 평년보다 낮아지면서 따뜻한 물이 서태평양 쪽으로 밀려나고,이 때문에 대류 활동이 활발해져 북태평양 고기압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태풍 추가 발생 가능성 커

과거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9월 폭우'가 최근 몇 년 새 더욱 심해지는 양상이다. 서울은 2005년 9월30일 하루 동안 104.5㎜가 쏟어졌다. 올 들어 이날 현재까지만 지난해(64.5㎜)의 10배에 달하는 656㎜의 비가 서울에 내렸다. 2007년 9월4~6일에는 제주도(553㎜)에 하루 평균 184㎜의 비가 내려 커다란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문제는 이 같은 '가을 물폭탄'이 앞으로 더 잦아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기상청 관계자는 "초가을엔 북태평양 고기압이 수축하는 게 일반적인데 올해는 라니냐 현상 때문에 지금까지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며 "북태평양 고기압의 가장자리에 있는 우리나라에 많은 수증기가 공급되고 있어 국지성 호우가 자주 나타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예년에 비해 태풍 발생 횟수가 아직 적은 것도 걱정스런 대목이다. 태풍은 통상 연간 30~40개가 발생하지만 올해는 말라카스가 겨우 12번째다. 기상청 관계자는 "태풍은 지구의 열을 서로 교환하는 역할을 해주는데 올해는 평년의 3분의 1 수준에 그치고 있다"며 "이는 여전히 대기가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어서 앞으로'지각 태풍'이 발생할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이번 집중호우로 수도권과 강원권에서 모두 1만4018가구가 침수피해를 봤다고 밝혔다. 서울 · 인천 · 경기도는 침수피해 주택에 100만원씩을 긴급 지원하는 등 피해복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김일규/강황식 기자 black0419@hankyung.com


◆ 라니냐

열대 동태평양의 해수면 온도가 낮아지는 현상.스페인어로 '여자아이(La Nina)'라는 뜻이다. 해수면 온도가 평균보다 0.4도 이상 낮은 현상이 6개월 이상 이어질 때를 말한다. 라니냐가 심해지면 필리핀,한국 등 아시아권에 집중호우가 잦아진다. 반대로 중태평양 바닷물 온도가 높아지는 '엘니뇨(El Nino · 남자아이)'가 나타나면 아시아권에는 가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