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앙은행의 달러 인쇄기가 빠를까,아니면 일본 중앙은행의 엔화 인쇄기가 더 빠를까의 문제다. "(앨런 러스킨 도이체방크 뉴욕지점 스트래티지스트)

미 달러화와 일본 엔화 간 환율전쟁이 제2라운드로 접어들 조짐을 보이자 글로벌 외환시장 전문가들은 이렇게 반응했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새로운 양적완화 조치 시사에 일본은행(BOJ)도 추가적인 양적완화로 응수할 태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전운이 짙어지자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국제 금값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12월 인도분이 22일 온스당 1292.10달러로 1.4% 뛰어올랐다. 달러당 엔화가치는 85엔대에서 84엔대로 상승했다.

◆미국의 '전략적 노림수'는

실업률이 9.6%에 달하고 2분기 경제성장률이 1.6%로 둔화된 미국 정부로선 추가 조치가 절박하다. FRB는 지난 21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 후 발표문에서 "물가상승률이 목표치보다 낮다"고 이례적으로 밝혔다. 가격 변동성이 큰 식품과 유류 등 에너지 항목을 제외한 지난 7월 소비자 물가는 전년 동기보다 0.9% 상승하는 데 그쳤다. 경기를 또 부양하지 않으면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에 빠질 수 있어 인위적으로 인플레(물가 상승)를 자극해야 할 상황인 것이다.

기준금리는 이미 제로(현행 연 0~0.25%)에 가까워 더 이상 손을 쓸 방법이 없다. 때문에 달러를 찍어 국채를 시중에서 대량 매입해 자금을 풀고,장기 국채금리가 떨어지도록 유도하겠다는 의도다. 실제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FOMC 발표문 영향으로 22일 3주 만의 최저치인 연 2.51%로 떨어졌다.

미국은 겉으로 강한 달러를 얘기하지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5년간 수출을 두 배로 늘리려면 약달러 기조가 유리하다. 추가적인 양적완화 조치가 이행되면 달러 가치는 자연스레 하락(엔화가치 상승)할 수밖에 없다. FRB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기 부양과 장기금리 인하 목적으로 통화완화 정책을 통해 1조7000억달러를 시중에 풀자 달러가치는 10%가량 하락했다. 미국의 양적완화 조치는 시중 유동성 확대,장기금리 인하,달러 약세라는 '세 마리 토끼잡기'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시장에서는 다음 FOMC 회의(11월2~3일)를 통해 국채 추가 매입조치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관측한다. 최근 골드만삭스는 FRB가 국채를 1조달러어치 매입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놨다. 2조달러를 점치는 시각도 없지 않다.

미국과 일본이 약달러 유도와 엔고 억제를 놓고 통화전쟁을 벌이는 것으로 비쳐지지만 미국 행정부는 일본의 외환시장 개입에 대해선 공개비난을 자제하고 있다. 위안화 절상문제를 놓고 중국에 연일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온 것과 대조된다. 이는 '중국이 일본 · 아세안 등과 벌이는 영토분쟁이 미국에 아시아에서 영향력 회복 기회를 주고 있다'(뉴욕타임스)는 분석과 맥이 닿는다. 미국을 축으로 한 환율전쟁 이면에는 지정학적 영향력 확보를 둘러싼 다툼이 있다는 지적도 그래서 나온다.

◆일본의 '엔고대응' 재개입 시점은

FRB의 추가 양적완화 시사에 일본 당국은 다시 비상이 걸렸다. 지난 15일 2조엔을 투입해 달러당 82엔대로 치솟은 엔화가치를 85엔대로 내려놓았더니 4일(영업일 기준) 만에 84엔대로 다시 오른 탓이다. 일본은 올해 외환시장 개입에 투입할 수 있는 실탄인 시장안정기금을 40조엔 확보해 놨으나 미국처럼 양적완화 조치로 대응할 가능성이 크다.

일본이 지난번처럼 외환시장에서 엔화를 팔고 달러를 사들이는 직접 개입은 아무래도 부담이다. 이런 강공책은 중국을 위안화 환율조작국이라고 몰아붙이면서 위안화 절상을 압박하던 미국의 뒤통수를 친 격이다. 같은 방법을 썼다가는 맞대결 식의 통화전쟁으로 비칠 수 있다.

미야오 류조 일본은행 심의위원이 22일 기자회견에서 FRB 발표와 관련한 질문을 받고 "여러 가지 정책의 효과와 부작용을 신중하게 점검하겠다"고 말한 대목에서 고민이 읽힌다. 아사히신문은 일본은행이 장기국채 매입을 늘리거나 정책금리를 연 0.1%에서 0~0.1%로 내릴 수 있다고 예상했다. 가이에다 반리 경제재정담당상도 장기국채 매입 가능성에 대해 "당연히 검토할 만한 방안"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야오 심의위원 역시 "논의 중인 장래의 선택 중 한 가지를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시사했다. 양적완화 대책을 발표한다면 일본은행이 다음 달 4~5일 갖는 금융정책결정회의 직후가 유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음 달 28일 경제전망 보고서를 발표하는 시점도 꼽힌다. 다만 엔화가치가 82엔대로 치솟을 경우 직접 개입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는 게 시장의 관측이다.

워싱턴=김홍열 특파원 com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