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사 자금을 빼돌리는 '횡령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횡령세력들이 사채를 동원해 상장사를 인수한 뒤 회삿돈을 속속들이 횡령하고 상장폐지시키는 행태다. 이런 횡령건수가 지난 5년간 277건,2조8309억원에 이를 정도로 위험수위에 달했다.

횡령을 막기 위한 감시와 처벌이 강화될수록 이를 피해가는 수법도 교묘해진다. '바지사장'을 내세우고 속전속결로 돈을 빼돌리는 '스피드 횡령'으로 법망을 피해가는 수법이다. 이 같은 횡령은 고스란히 투자자들의 피해로 이어져 시장에 대한 불신을 키우고 있다. 이는 시장경제의 근간인 주식회사와 상장제도에 대한 신뢰마저 흔들 것이란 우려가 높다.

◆'바지사장' 고용해 법망 피해

법원이 2000년대 중반부터 횡령 혐의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자 횡령세력들은 명의를 내세울 '바지사장'을 고용해 이를 피해간다. 횡령 '몸통'은 고리 사채를 끌어다 기업 경영권을 인수한 뒤 바지사장을 통해 내부유보금 등 회삿돈을 횡령해 사채를 갚고 인수한 주식과 회사자산을 팔아 돈을 챙긴다. 이 과정에서 바지사장은 몸통을 대신해 일체의 책임을 지는 조건으로 리베이트를 받는다.

횡령 몸통으로 몇 차례 관여했다는 A씨는 "사안에 따라 다르지만 전체 수익의 10% 정도가 바지사장에게 돌아간다"며 "주식 매각차익까지 합쳐 200억~300억원의 돈을 빼내면 바지사장도 20억~30억원을 챙길 수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보통 2년에서 길게는 6년까지 징역을 살아야 하는 게 부담이지만 몇 년 안에 수십억원을 만질 수 있어 바지사장을 자원하는 이들도 있다"고 덧붙였다.



◆'스피드 횡령'으로 속전속결

금융당국의 감독 강화도 횡령을 근절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금융당국은 지난해부터 회계분식을 묵인한 회계법인에 영업정지 등 처벌을 강화했고 횡령이 발생한 상장사는 상장폐지실질심사에 회부하도록 했다. 하지만 횡령세력들은 기업경영권 인수에서 횡령 및 상장폐지까지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는 방식으로 이에 대응하고 있다. 정상적인 상장사를 인수해 횡령한 뒤 이를 적발한 회계법인의 감사보고서가 나오기 전에 횡령을 마무리하는 방식이다.

코스닥 기업 아구스는 지난해 8월17일 최대주주가 바뀐 이후 7개월 만에 대표이사의 횡령으로 인해 올 4월 퇴출됐다. 지난해 반기보고서가 제출된 사흘 뒤 경영권을 인수한 천모씨 등은 올 3월 2009회계연도 감사보고서가 나오기 전 161억원을 서둘러 횡령했고 인수 당시 매입한 주식도 모두 팔아치웠다. 네오세미테크도 회계감사가 비교적 느슨한 우회상장을 통해 지난해 10월 코스닥에 입성한 뒤 5개월 만에 거래가 정지됐다. 전 대표이사인 오모씨는 짧은 기간에 수백억원의 회삿돈을 빼돌린 뒤 이를 감추기 위해 분식회계를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보통 1년6개월~2년 걸렸던 부실기업 퇴출과정이 올 들어 단축되면서 횡령세력도 더욱 빨리 움직이고 있다"며 "기업정보를 전적으로 공시에 의존하는 소액주주들은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횡령혐의 벗는 데 수십억원 쓰기도

횡령을 통해 모은 돈은 횡령혐의에서 빠져나가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법조계에 따르면 검찰이나 법원에서 갓 퇴임한 전관 출신 변호사들이 횡령 · 배임 · 주가조작 등 상장기업의 비리사건과 관련해 받는 수임료는 많을 때는 10억원에서 2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법조계 관계자는 "구속, 기소를 막거나 기소내용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검찰 출신 변호사들이 최우선 선임 대상이 된다"며 "피의자 한 명이 변호사 5명을 쓰며 웬만한 대기업 수준의 변호인단을 구성하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이런 와중에서 소액주주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조성제 아구스 소액주주 대표는 "반지하방에 살면서 3억원을 투자했다가 회사가 상장폐지당하자 음독자살을 시도했다가 가족이 발견해 목숨을 건진 주주도 있다"고 전했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