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사 경영진이 기업 사냥꾼과 연계해 회삿돈을 빼돌린 횡령액이 지난 5년간 2조8000억원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 중 70% 이상이 회사 주인(최대주주)이 바뀐 지 1년 이내에 발생해 기업 경영권 시장이 회사 자산을 노리는 세력에 의해 악용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박경서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상장사 기업공시를 분석한 결과 총 277건의 횡령사건이 발생했고 피해액은 2조8309억원에 달했다고 27일 밝혔다. 박 교수는 이 같은 연구 결과를 해외 학술지에 발표하기 위해 '한국 기업 경영권 시장의 도둑경영자들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을 준비 중이다.

이 조사에 따르면 상장사 횡령사건은 한 해 평균 55.4건,횡령액은 5661억원(건당 102억원)에 달했다. 특히 2005년 32건,2006년 24건이던 횡령 건수가 2008년 112건으로 급증했고 지난해에도 60건이 발생했다. 올 들어선 코스닥 시가총액 26위(4083억원)였던 네오세미테크가 분식회계와 전 대표이사의 횡령으로 퇴출되는 등 79개사가 상장폐지돼 경영진에 의한 횡령이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특히 최대주주가 바뀐 지 1년이 안 된 상장사에서 횡령 · 배임사건이 발생한 건수는 204건으로 73%를 차지했다. 박 교수는 "이는 처음부터 회사 자산을 사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기업 경영권을 취득한 경우가 많다는 의미"라며 "기업 경영권 시장이 부실 경영진을 퇴출시키는 경영규율 기능을 갖고 있다고 학계에서 봐왔던 것과는 상반된 결과"라고 지적했다.

제도적으로 횡령을 막고 처벌을 강화하는 노력이 진행 중이지만 이를 피해 가는 수단도 고도화하고 있다. 법원이 횡령사건에 대한 양형을 강화하자 실제 횡령을 주도하는 '몸통'이 '바지 사장'을 내세워 법적 책임을 지게 하는 경우가 많다고 박 교수는 설명했다. 지난해 상장폐지 실질심사제 도입으로 회계감독이 강화되자 담당 회계법인의 감사의견 제출 전에 서둘러 횡령을 마무리짓고 회사를 상장폐지하는 '스피드 횡령' 수법도 등장했다.

박 교수는 "횡령 · 배임은 해당 기업의 주주가치를 훼손할 뿐 아니라 다수의 투자자들을 증시에서 몰아내는 부작용까지 낳는다"며 "자본주의의 핵심인 주식회사 및 상장제도의 근간을 흔든다는 점에서 법적 처벌을 강화해 근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