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조달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글로벌 금융시장의 '큰손',국부(國富)펀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활동이 주춤했으나 올 들어 각국 국부펀드의 움직임이 왕성해졌다. 정부 자산이 기반인 각국 국부펀드의 주 관심사는 전통적으로 채권 부동산 등 안전자산.최근엔 주식과 펀드,기업 인수 · 합병(M&A) 쪽으로 보폭을 넓히고 있다. 투자 대상인 '먹잇감' 값이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떨어질 만큼 떨어졌다는 판단에서다. "20년 만의 최대 기회"(월스트리트저널)라는 진단도 나온다. 해외 자원업체 인수 등으로 활동영역을 넓히고 있는 한국의 국민연금과 공기업,민간의 주요 기업들은 중국 국부펀드를 비롯한 골리앗들과 진검승부를 벌여야 할 때도 적지 않다.


◆글로벌 인수 · 합병(M&A) 큰손 부상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사실상 관망세에 들어간 시장을 깨운 큰손은 중국과 중동이다. 수출 확대를 통해 벌어들인 돈(중국)과 오일머니(중동) 등 풍부한 현금이 가장 큰 무기다. 글로벌 경기가 회복세를 보이면서 각국의 자신감도 커졌다. 2007년 2000억달러 규모의 펀드를 조성한 중국국부펀드인 중국투자공사(CIC)는 2008년 -2.1%였던 수익률을 지난해 11.7%로 끌어올렸다. 자산 규모도 올해 전년 대비 70%가량 늘어난 3324억달러(393조원)로 덩치가 커졌다.

이를 기반으로 중국이 최근 집중하는 분야가 에너지와 자원이다. 지난해 9월 홍콩의 농산물 공급 업체인 노블그룹에 8억5000만달러,러시아의 원유생산 기업인 노벨오일에 3억달러를 투자한 CIC는 올해 미국 에너지 업체인 펜웨스트에너지에도 12억달러를 투자했다.

CIC는 또 전력회사,항만운영사,석탄생산회사 등 인도네시아 3개 국영기업에 200억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라고 인도네시아 일간 자카르타포스트가 이달 초 보도했다.

특히 중국의 해외자원투자에는 국영기업들까지 가세,정부와 기업간 공조가 갈수록 강화되는 추세다. 중국 최대 석유업체 시노펙이 지난 4월 세계 최대 오일샌드업체인 신크루드의 지분 9%를 46억5000만달러에 인수한 데 이어 중국알루미늄공사는 지난달 리오틴토의 기니 광산 지분 44.65%를 13억5000만달러에 인수키로 했다. CIC가 운용을 맡긴 중국개발은행이 자금의 50% 이상을 해외 자원에 투자했다는 게 와이호룽 바클레이즈캐피털증권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이다.

오일머니를 앞세운 중동 국부펀드들의 움직임도 활기를 띠고 있다. 선두주자는 카타르다. 연간 운용금액이 300억달러에 달하는 카타르투자청은 최근 산하 투자기관인 카타르홀딩스를 통해 세계 3위 해운업체로 꼽히는 프랑스의 CMA CGM 인수 계획을 내비쳤다. 업계에 따르면 카타르홀딩스는 CMA CGM 지분을 최대 49%가량 인수할 전망이다. 카타르투자청은 이 외에도 3억달러를 동원해 그리스 최대 은행 인수를 추진 중이다.

◆입맛 다양해지는 국부펀드

국부펀드의 투자 스펙트럼도 다양해졌다. 럭셔리 백화점부터 프로축구단까지가 대상이다. '안정'과 '수익'을 동시에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더타임스는 "중국인 기업가 케네스 황이 리버풀 인수를 추진하고 있으며,중국 국부펀드가 컨소시엄에 참여,지분을 갖는 방식을 고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카타르투자청 산하 카타르홀딩스는 세계 각국 부유층들의 쇼핑 명소로 유명한 런던의 해러즈백화점을 15억파운드에 인수했다고 블룸버그통신이 보도했다.

최근 새롭게 부상하는 분야는 부동산이다. CIC는 하버드대 기금의 5~6개 부동산펀드를 5억달러에 인수하기 위해 접촉 중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다. WSJ는 CIC가 과거 일본이 미국 부동산을 직접 매입했다가 현지에서 반일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을 감안해 부동산펀드를 택해 정치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전략을 쓰고 있다고 전했다.

◆방어용 · 친환경 국부펀드 등 차별화

국부펀드는 자금난에 시달렸던 글로벌 기업들의 숨통을 터주는 데다 장기 투자라는 점에서 환영받는다. 투자한 해외 기업을 통한 기술 확보도 가려진 전략 목표다. 중국과 중동,싱가포르 등의 활약을 눈여겨봐온 후발국가들이 최근 국부펀드 설립을 추진하거나,중앙은행과 연기금을 동원해 해외 투자 활동을 강화하고 나선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싱가포르의 테마섹 같은 국부펀드 설립을 추진 중인 대만이 대표적이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대만 정부는 자산관리를 통해 높은 수익을 거둘 수 있는 투자회사 설립 방안을 전문가들에게 올 연말 시한으로 요구해둔 상태다. 인도도 100억달러 규모의 국부펀드 설립을 추진중이다.

일부 유럽 국가는 이 같은 국부펀드들의 공격적 투자 부작용을 방어하기 위한 펀드까지 만들었다. 프랑스는 2년 전 전략투자기금(SIF)을 만들어 외국 기업에 팔릴 위기에 놓인 자국 기업들을 보호하는 '안전판' 역할을 맡겼다. 이 펀드는 지난해 케이블회사인 넥산스가 부채 증가 등 실적이 좋지 않은 데다 대주주가 없어 적대적 M&A 위협에 노출되자 600만유로를 들여 이 회사 지분 5%를 장내 매수하고 경영권을 안정시켰다.

이관우/김정은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