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늘 쓰는 볼펜에도 첨단 기술이 숨어 있다. 볼펜에선 어떻게 잉크가 끊이지 않고 나오는 것일까. 비결은 볼펜 끝 베어링에 있다. 이 베어링은 지름이 0.3~1㎜에 불과하고,정밀도가 0.1미크론 이내의 초정밀 제품이다. 표면에는 골프공처럼 수많은 홈(딤플)이 나 있다. 볼베어링이 구르는 동안 이들 딤플이 잉크를 나른다. 이 딤플 가공이 첨단 정밀가공기술에 해당한다. 김포에 있는 에스비비테크는 이런 초정밀 세라믹 베어링과 정밀제어감속기 등을 만드는 정밀부품 가공업체로 일본 기업들도 이 회사 제품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김포에서 강화대교로 진입하기 직전 바로 오른쪽 산 중턱에 에스비비테크(SBB Tech · 대표 이부락)라는 회사가 있다. 행정구역으론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이다. 이부락 대표(58) 방에는 각종 부품들이 즐비하다. 마치 대학 연구실에 들어온 듯하다.

세라믹 베어링과 정밀제어감속기 등 첨단 부품들이다. 이 대표가 평생 골프도 안 치고 술도 안 마시면서 기술개발에 노력해 이룩한 산물이다.

◆'로봇산업의 쌀' 감속기 일본 아성에 도전

산업의 쌀이 반도체라면,로봇의 쌀은 감속기다. 감속기는 속도를 줄여주는 부품이다. 모터는 고속으로 회전한다. 이를 곧바로 기계 작동으로 연결시킬 수는 없다. 회전수를 줄여줘 힘을 증가시켜야 한다. 이 역할을 하는 게 감속기다. 감속기는 로봇이나 반도체 장비,LCD 장비 등에 사용된다. 이 과정에서 정밀작업이 수행되려면 감속도 정확하게 이뤄져야 한다.

예컨대 반도체 공장이나 LCD 공장에서 부품을 옮길 때 정확하게 이송되지 않으면 불량이 생긴다. 이를 제어하는 게 감속기다. 정밀제어감속기는 일본의 H사가 세계시장에 독점 공급한다. 전 세계 어느 기업도 이 아성을 깨지 못했다.

이 대표는 "에스비비테크가 정밀제어감속기를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개발했다"고 밝힌다. 게다가 기존 제품보다 훨씬 싼 가격에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정밀제어감속기의 개당 가격은 평균 100만~200만원대에 이른다. 로봇에는 여러 개의 감속기가 들어가는데 이 가격으로는 청소용 로봇 등 저렴한 생활용 로봇을 만드는 데 한계가 있다. 감속기 가격을 낮추는 것은 로봇을 저렴하게 만들 수 있는 핵심기술이 된다. 이 대표는 "기존 제품보다 30~40% 낮은 가격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기술도 확보했다"고 밝힌다.

세계 수백개 업체가 도전했다가 실패한 감속기 개발에 성공한 것은 두 가지 요인 덕분이다. 첫째,세라믹 전문업체로서 노하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밀제어감속기는 스테인리스 소재 커버와 베어링으로 구성된다. 그 베어링이 세라믹 베어링이다. 세라믹 베어링은 가볍고 단단하면서도 정밀한 특징이 있다. 오차가 적은 정밀부품을 만드는 데 필수적이다. 에스비비테크는 이 세라믹 베어링을 20년 이상 만들어와 많은 노하우가 축적돼 있다.

둘째,정부의 특허개발(IP-R&D)사업 지원이다. 이를 통해 약 1억원의 자금과 특허 관련 전문인력의 도움을 받았다. 기술을 열심히 개발해 특허를 내려고 하는데 외국 기업의 특허에 저촉된다면 그동안 개발한 게 무용지물이 된다. 따라서 사전에 전 세계 특허를 조사한 뒤 이를 피할 방법을 찾아 그 길로 기술개발과 특허 획득에 나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책이 특허개발사업 지원이다. 특허는 국제 무역전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중소기업이 거대 다국적기업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무기다.

정밀제어감속기 시장은 급성장하고 있다. 로봇 수요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제품이 개발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문의가 줄을 잇고 있다. 일본에서도 전화가 올 정도다.

진공펌프용 분자이송장치도 개발 중이다. 이 장치는 대당 3000만원에서 1억원에 이를 정도로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이다. 이 대표는 "진공펌프용 분자이송장치는 독일과 일본만이 생산하고 있는데,앞으로 3년 내에 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세라믹 분야에서만 25년 '한 우물'

이 회사가 앞선 제품을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대표의 기술 개발에 대한 집념 때문이다. 경북대 전자공학과를 나온 이 대표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볼펜용 세라믹 볼 등을 개발해왔고,1993년 서한산업을 창업했다. 서한산업은 에스비비테크의 전신이다. 올해로 창업한 지 17년째이지만 세라믹 분야에 종사한 것은 25년에 이른다. 하지만 아직도 골프를 할 줄 모르고,술도 마시지 않는다. 오로지 기술 개발에만 매달리고 번 돈을 전부 연구개발에 쏟아붓는다. 이 대표가 휴대폰을 받지 않을 때는 전파가 차단된 실험실에서 일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서울 일원동 지하 셋방에서 직원 5명을 데리고 사업을 시작했다. 볼펜용 볼,하중을 많이 받는 기계 부품용 베어링,치구용 베어링 등을 개발했다. 이후 각종 세라믹 베어링을 개발하면서 50여건의 국내외 특허와 실용신안을 획득했다.

에스비비테크는 김포와 수원에 각각 연구소를 두고 있다. 이들 연구소에 전체 직원 90명의 16.7%에 해당하는 15명의 인력을 배치해 놓고 있다. 서울대 한양대 한서대 요업기술원 한국화학연구원 등과 산학협력을 통해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베어링은 기계산업에서 약방의 감초다. 자동차와 항공기 헬리콥터 공작기계에 베어링이 들어간다. 컴퓨터 가전제품도 마찬가지다. 컴퓨터 하드디스크도 베어링이 있어야 구동한다. 반도체나 LCD 생산라인에도 어김없이 특수 베어링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웨이퍼나 패널을 이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기계의 모든 부분에는 베어링이 있다. 만약 베어링이 없다면 이 세상의 모든 자동차 공작기계 전자제품이 멈춰서게 된다.

이 회사는 일반 스틸 베어링이 아닌 첨단 세라믹 베어링을 만든다. 이 중 일부 세라믹 베어링은 일본보다 먼저 개발한 것이다. 일부 제품은 미국 제품보다 가격이 두 배 이상 비싸다.

이 대표는 "반도체 웨이퍼 이송 로봇용 베어링을 세라믹으로 개발했더니 스틸을 재료로 한 미국 제품보다 2.2배 비싼 가격에 팔린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 베어링은 내구성이 뛰어나 자주 보수해야 하는 스틸 베어링의 불편을 덜 수 있다"고 덧붙인다. "반도체 공정에서는 미세 먼지를 줄여야 하는데,세라믹 베어링은 먼지 발생을 억제해 초청정 상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덧붙인다. 이 대표는 "LCD기판 이송용 장비의 베어링도 일본보다 먼저 개발해 일본 특허를 획득했다"고 밝힌다.

◆고급 승용차용 첨단 베어링 등 속속 개발

이 회사가 만드는 세라믹 베어링은 질화규소 볼베어링,지르코니아 볼베어링,탄화규소 볼베어링,알루미나 볼베어링 등이 있다. 이 중 질화규소 볼베어링은 열과 충격에 강하고 내(耐)마모성과 내식성이 뛰어나 우주 및 항공기용 부품,진공 펌프,반도체 및 LCD 제조설비 부품,자동차 부품 등에 쓰인다.

이 대표는 "이들 세라믹 베어링은 비싸지만 스틸 베어링에 비해 강도가 높고 내구성이 뛰어난 데다 가벼워 고급 승용차의 경우 차축용 베어링을 점차 세라믹으로 바꾸고 있다"고 덧붙인다. 에스비비테크가 첨단 제품을 속속 개발하자 몇 년 전 우리은행은 이 회사에 대해 21억원을 담보나 보증 없이 대출해주기도 했다. "이 같은 파격적인 대출은 아마도 은행 역사상 처음일 것"이라고 이 대표는 소개한다. 이 회사의 2009년 매출은 80억원,올해는 100억원을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 생산 제품은 반도체나 LCD 장비 업체 등에 납품한다.

이 대표는 이들 기술을 토대로 인공 고관절 등 의료용 소재 개발에도 나서고 있다. 그는 "이미 10년 동안 이 제품을 개발해 오고 있다"며 "앞으로 이 제품이 국내외 임상 실험과 해당 관청의 사용 허가를 얻게 되면 본격적인 판매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힌다. 에스비비테크와 같은 기업이 많이 생겨난다면 그동안 숙원이던 대일(對日) 무역역조가 개선될 날이 멀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낙훈 중기전문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