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했습니다. 모두에게 박수를 치며 시작하시죠."

지난달 22일 경기도 이천 하이닉스반도체 본사 아미문화센터 아트홀.1조원이 넘는 사상 최대 영업이익을 낸 2분기 실적을 알리기 위해 직원들 앞에 선 권오철 사장은 지난 10년의 험난한 여정을 떠올렸다. 독자생존 능력이 없다는 사형선고를 받고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와 굴욕적인 매각협상을 벌였던 2000년,삼성전자 대비 5분의 1에 불과한 투자비로도 결코 뒤처질 수 없다며 절치부심했던 시간들,극심한 반도체 불황에 4조7450억원이란 엄청난 적자를 냈던 2008년의 고통에 이르기까지….

10여초 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권 사장은 "모두 수고했습니다"란 말을 꺼낸 뒤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임직원들도 이심전심으로 박수를 쳤다.

◆위기 앞에 더 강해지는 하이닉스

하이닉스반도체는 지난 2분기에 창사 이래 사상 최대 실적을 거뒀다. 3조2790억원의 매출과 1조450억원의 영업이익으로 두 부문 모두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영업이익률은 32%로 반도체업체 중 단연 1위다. 글로벌 금융위기로부터 완벽하게 탈출했다는 것을 알리는 성과였다. 하이닉스는 2007년 4분기부터 7분기 연속 적자를 냈으나,지난해 3분기 이후 4분기 연속 흑자를 달성했다.

이처럼 짧은 시간에 금융위기를 극복해낸 요인으로는 하이닉스 특유의 응집력과 위기돌파 능력이 첫 손가락에 꼽힌다. 하이닉스는 1999년 옛 LG반도체를 인수한 지 2년도 지나지 않아 2001년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생산능력 면에서는 세계 최고였지만,재무구조가 나빴던 데다 생산성과 수율이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뼈를 깎는 구조조정과 수익성 개선 노력으로 2005년 채권단 공동관리 체제에서 벗어났지만,반도체 불황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지난해 또 다시 재무구조개선약정을 맺어야 했다. 많은 동료들이 떠나고 임금도 삭감됐다. 사기가 떨어질 법도 했지만 임직원들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어떤 위기든 넘어설 수 있다는 내부의 자신감이 버팀목이었다. 손수익 이천 M10공장 상무는 "2000년 초 해외 매각 위기를 넘긴 뒤 국민들이 지켜준 회사를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며 "위기를 통해 주인의식이 뿌리를 내리면서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무난히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남 다른 주인의식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생산성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반도체 생산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포토장비를 만드는 네덜란드 ASML사는 최근 한 조사결과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전 세계에서 가동 중인 자사 장비 중 생산성이 가장 우수한 장비 4대 중 3대가 하이닉스의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하이닉스는 지난해 공정혁신을 통해 1개월치를 더 생산한다는 의미에서 '13월의 달력'까지 만들었다. 불필요한 공정을 효과적으로 줄여 예년보다 24일치를 더 생산해내는 데 성공했다. 직원들 모두가 연구 · 개발(R&D),생산 등 부서 간의 장벽을 없애고 자발적으로 협력했기에 가능한 성과였다.

◆'오래 가고 좋은 회사'로 간다

권 사장은 지난 3월 취임과 함께 '오래 가고 좋은 회사(Good memory Great company)'라는 새 비전슬로건을 내놓았다. 시황에 따라 잦은 위기를 겪던 과거와 달리 외부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탄탄한 회사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그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핵심사업 집중이다. 권 사장은 "메모리 반도체라는 핵심사업에 집중해 확고한 경쟁우위를 확보하는 게 최우선 과제"라고 강조했다.

하이닉스가 올해 주력하는 것은 원가경쟁력과 생산성을 동시에 높일 수 있는 미세공정 전환이다. 30나노급 D램 개발을 4분기까지 완료하고,내년 초 양산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달에는 20나노급 낸드 플래시메모리 양산도 시작했다. 업계 1위 삼성전자와는 기술 격차를 거의 좁혔고 일본,미국,대만업체들에 비해서는 1~2년 이상 앞서가고 있다.

시황의 영향을 덜 받기 위해 고부가가치 제품 비중도 높이고 있다. 2007년 1분기 30% 수준이던 서버,모바일,그래픽 등 고부가가치 D램 비중을 지난 2분기에는 50%까지 끌어올렸고,3분기에는 60%대까지 높일 예정이다. 후발업체들과의 기술격차를 더 벌리기 위해 R&D 투자도 꾸준히 확대하고 있다. 지난해 R&D 투자비는 6728억원으로 매출 대비 비중이 8.95%에 달했다. 국내 10대 제조업체 중 가장 높은 비율이다. 최고기술책임자(CTO) 박성욱 부사장은 "2007년 이후 R&D 투자를 늘리며 4~5년 뒤 기술까지 미리 대비하는 체제를 갖췄다"며 "앞으로도 R&D 투자 비중을 10% 안팎으로 유지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통해 차세대 메모리(STT-램,P램 등)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선 2007년 이미지센서(CIS) 시장에 진출한 데 이어 올해는 이 분야 수익성 개선까지 기대하고 있다.

박 부사장은 "청주 8인치 라인은 현재 낸드 플래시 생산에 80%가량 치중하고 있지만, 내년 말에는 CIS 등을 주력으로 생산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천=김태훈 기자 tae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