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길진 칼럼] 대인(大人) 흉내는 내면서 살자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대인(大人)과 소인(小人)을 어떻게 구분합니까?" 어떤 분이 필자에게 뜬금없이 물었다. 우스갯소리로 ‘목욕탕에 가 보면 알 수 있습니다’라고 웃으면서 대답은 했지만, 그것을 구분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공자의 말에 따르면 ‘이(利)를 중히 여기면 소인(小人)이고, 의(義)를 중히 여기면 대인(大人)이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현대인치고 이(利)를 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소인보다는 대인이 되고 싶어 하는 건 인지상정일지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소인이 될 지라도 이(利)를 추구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솔직한 마음이 아닐까 한다.
요즘 의사업계의 상황을 보면 병원에서 전공의 모집을 할 때 외과, 산부인과, 흉부외과는 면접을 볼 필요도 없다고 한다. 지원자가 턱없이 모자라니 굳이 면접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피부과나 성형외과보다 힘만 들고 돈도 많이 벌지 못하니 수련의들이 지원하기를 꺼려하는 이유다. 의사도 인간이기에 이(利)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의료업계에서는 견이사의(見利思義)를 말하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가 된지 이미 오래라고 말한다.
이(利)를 생각하는 것이 소인이라면 대인은 어떤 사람일까. 의(義)를 생각하는 대인은 소인과 격(格)이 다른 것인가.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재상 맹상군은 자신의 영지인 설(薛)읍에 가서 부채가 있는 사람들의 빚을 모두 거두어 오라는 명을 내리면서 누가 가겠느냐 물을 때 식객인 풍훤이 나서서 자기가 가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빚을 다 받으면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물었다. 맹상군은 자네가 알아서 우리 집에 부족한 것을 사오라 했다. 그곳에 도착한 풍훤은 빚을 거두는 대신 백성들의 차용증서를 모두 불태워 버리고 맹상군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설읍 사람들은 모두 ‘맹상군 만세’를 외쳤다.
일을 마치고 제나라로 돌아온 풍훤에게 맹상군은 물었다. ‘빚으로 무엇을 사왔는가’풍훤은 ‘이 집에는 없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조금 부족한 것은 ‘의(義)’가 없더이다. 그래서 의를 사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맹상군은 몹시 기분이 상했지만 차마 그를 탓할 수 없었다.
1년 후 맹상군은 왕의 노여움으로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 영지인 설(薛)읍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설(薛)읍 1백리 밖에 도착했을 때 그 곳 백성들이 모두 나와 맹상군을 영접해 주었다. 맹상군은 몹시 감격했으며, 풍훤을 쳐다보며 ‘선생이 사온 의(義)라는 물건을 오늘에서야 보게 되는 구려’하며 풍훤의 긴 안목을 칭찬했다. 풍훤은 이(利)는 잠깐이지만 의(義)는 영원한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의(義)를 중히 여기던 옛날과는 달리 현대사회는 이(利)를 더 중히 여긴다. 공자의 기준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대인보다는 소인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소인 천국일지도 모른다. 곳간이 차야 인심도 난다는 말처럼, 우리가 살면서 이(利)보다 의(義)를 먼저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얘기다. 그래서 주변에는 대인 같으면서도 소인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소인 같으면서도 대인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이다.
평생 김밥장사를 하면서 모은 10억을 선뜻 기부하는 할머니가 있는가 하면, 공금으로 몇 푼의 장학금을 대납하고 생색을 내는 기업인도 있다. 건물 경비원이면서도 건물 주인의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인이면서도 경비원보다 못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는 걸 봐서는 적어도 사람의 지위(地位)와는 관계가 없고, 인품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반드시 이(利)를 추구한다고 하여 소인이라고 할 수 없다. 적은 이를 가지고도 큰 의(義)를 베푸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큰 이(利)를 가지고도 작은 의(義)조차 베풀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가진 것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생각의 차이다. 마음은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일을, 나의 일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대인인 것이다. 대인과 소인의 차이는 그런 것이다. 견이사의(見利思義)의 마음처럼 어려운 때일수록 대인은 아니더라도 대인의 흉내는 내고 살아도 과히 나쁘지 않을 것 같다. (hooam.com/whoim.kr)
☞ 차길진 칼럼 더 보기
요즘 의사업계의 상황을 보면 병원에서 전공의 모집을 할 때 외과, 산부인과, 흉부외과는 면접을 볼 필요도 없다고 한다. 지원자가 턱없이 모자라니 굳이 면접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피부과나 성형외과보다 힘만 들고 돈도 많이 벌지 못하니 수련의들이 지원하기를 꺼려하는 이유다. 의사도 인간이기에 이(利)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의료업계에서는 견이사의(見利思義)를 말하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가 된지 이미 오래라고 말한다.
이(利)를 생각하는 것이 소인이라면 대인은 어떤 사람일까. 의(義)를 생각하는 대인은 소인과 격(格)이 다른 것인가.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재상 맹상군은 자신의 영지인 설(薛)읍에 가서 부채가 있는 사람들의 빚을 모두 거두어 오라는 명을 내리면서 누가 가겠느냐 물을 때 식객인 풍훤이 나서서 자기가 가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빚을 다 받으면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물었다. 맹상군은 자네가 알아서 우리 집에 부족한 것을 사오라 했다. 그곳에 도착한 풍훤은 빚을 거두는 대신 백성들의 차용증서를 모두 불태워 버리고 맹상군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설읍 사람들은 모두 ‘맹상군 만세’를 외쳤다.
일을 마치고 제나라로 돌아온 풍훤에게 맹상군은 물었다. ‘빚으로 무엇을 사왔는가’풍훤은 ‘이 집에는 없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조금 부족한 것은 ‘의(義)’가 없더이다. 그래서 의를 사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맹상군은 몹시 기분이 상했지만 차마 그를 탓할 수 없었다.
1년 후 맹상군은 왕의 노여움으로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 영지인 설(薛)읍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설(薛)읍 1백리 밖에 도착했을 때 그 곳 백성들이 모두 나와 맹상군을 영접해 주었다. 맹상군은 몹시 감격했으며, 풍훤을 쳐다보며 ‘선생이 사온 의(義)라는 물건을 오늘에서야 보게 되는 구려’하며 풍훤의 긴 안목을 칭찬했다. 풍훤은 이(利)는 잠깐이지만 의(義)는 영원한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의(義)를 중히 여기던 옛날과는 달리 현대사회는 이(利)를 더 중히 여긴다. 공자의 기준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대인보다는 소인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소인 천국일지도 모른다. 곳간이 차야 인심도 난다는 말처럼, 우리가 살면서 이(利)보다 의(義)를 먼저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얘기다. 그래서 주변에는 대인 같으면서도 소인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소인 같으면서도 대인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이다.
평생 김밥장사를 하면서 모은 10억을 선뜻 기부하는 할머니가 있는가 하면, 공금으로 몇 푼의 장학금을 대납하고 생색을 내는 기업인도 있다. 건물 경비원이면서도 건물 주인의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인이면서도 경비원보다 못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는 걸 봐서는 적어도 사람의 지위(地位)와는 관계가 없고, 인품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반드시 이(利)를 추구한다고 하여 소인이라고 할 수 없다. 적은 이를 가지고도 큰 의(義)를 베푸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큰 이(利)를 가지고도 작은 의(義)조차 베풀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가진 것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생각의 차이다. 마음은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일을, 나의 일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대인인 것이다. 대인과 소인의 차이는 그런 것이다. 견이사의(見利思義)의 마음처럼 어려운 때일수록 대인은 아니더라도 대인의 흉내는 내고 살아도 과히 나쁘지 않을 것 같다. (hooam.com/whoim.kr)
☞ 차길진 칼럼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