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소비자가격이 떨어지는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다시 커지고 있다. 특히 주요 20개국(G20) 정상들이 2013년까지 재정적자 규모를 절반 수준으로 줄이기로 합의하면서 재정 확대를 통한 경기 부양이 어려워질 것이란 점에서 수요 위축에 따른 디플레이션 가능성이 고개를 들고 있다. 미국을 포함한 선진국 정부가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경기부양책을 없애면 고용사정이 다시 악화될 수 있는 데다 생산갭(잠재성장률과 실질성장률 간 차이)이 커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국제 신용평가업체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의 데이비스 위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28일 맨해튼 S&P 본사에서 한국 특파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미국 경제가 당장 디플레이션에 빠질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지난달 식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핵심물가 상승률이 1%를 밑돈 점에 비춰볼 때 디플레이션 위험이 크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주택 가격 하락으로 가계의 부(wealth)가 감소하고 있는 데다 경색된 차입 여건이 좀체 풀리지 않는 점도 소비 회복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그동안 미국 경기 회복을 이끌어온 경기부양책이 점차 축소되면 수요가 다시 위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위스 이코노미스트는 디플레이션을 막을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으로는 미국 통화당국이 장기 금리를 더욱 낮게 유지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사실상 제로 수준인 기준금리를 더 낮출 수 없는 상황에서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모기지(주택담보대출) 증권 등을 추가 매입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학계에서도 디플레이션 우려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앤서니 샌더스 조지메이슨대 교수는 최근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 "디플레이션을 경고하는 징후들이 있다"며 "은행들이 대출을 꺼리는 현상이 이어지면 미국 경제가 디플레이션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경기 회복이 지연될수록 디플레이션 위험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마크 거틀러 뉴욕대 교수도 "미국 경제는 3~4% 내외의 성장과 1~1.5% 정도의 물가상승률을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며 "현재로선 인플레이션보다는 디플레이션이 가져올 위험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 통화당국도 디플레이션 우려를 염두에 두고 경제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디플레이션이 일단 빚어지면 이를 막기 어려울 뿐 아니라 경제를 심각하게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우려하는 것이다. 일본의 장기 불황도 일본 경제가 디플레이션 늪에 빠진 결과였다. 디플레이션은 소득 감소로 이어져 가계는 물론 기업과 정부의 빚 상환 부담이 커지게 된다.

뉴욕연방은행에서 시장그룹을 이끌고 있는 브라이언 색 이사는 디플레이션을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물가가 지나치게 낮아지는 위험과 함께 가격이 급등할 수 있다는 점을 동시에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월가 이코노미스트들 역시 인플레이션보다는 디플레이션을 미국 경제가 직면한 위험으로 꼽고 있다. 얀 하지우스 골드만삭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재정과 통화의 확장정책으로 인해 상당수 시장참여자들이 인플레이션을 걱정하고 있지만 이는 막대한 생산갭을 간과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뉴욕=이익원 특파원 i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