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여행] 경남 고성‥너의 흔적 따라가면 나를 지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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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족암과 고분군
천연기념물 411호 상족암 기암괴석 앞에 펼쳐진
너럭바위에 거칠게 새겨진 공룡발자국…
공룡처럼 사라지지 않으려면
인간은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져야 하는데
천연기념물 411호 상족암 기암괴석 앞에 펼쳐진
너럭바위에 거칠게 새겨진 공룡발자국…
공룡처럼 사라지지 않으려면
인간은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져야 하는데
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경남 고성(固城)은 고성(孤城)이다. 조선시대 지리서 《동국여지승람》 고성현 편은 고성군의 지형이 '외로운 성이 바다에 임한 형국'이라고 했다. 고성읍으로 들어가는 국도변 논에는 어린 벼들이 푸릇푸릇하다. 고성 농요는 가장 원형을 잘 갖춘 농요로 알려져 있다.
"더디고 더디고 더디다/ 점심 채비가 더디다/ 숟가락 단반에 세니라고 더디나/ 바가지 죽반에 세니라고 더디나/짚신 한 짝,메투리 한 짝 끈니라고 더디나/ 작은에미,큰에미 싸운다고 더디나. "
소가야 때부터 조선 왕조 말까지의 모내기 양식이 가사로 전해오는 '등지가'의 한 토막이다. '등지'란 모내기소리를 뜻하는 경남지방 사투리다. 점심 내오기를 기다리는 농부의 조바심이 잘 드러나 있다.
김말로가 세운 소가야의 옛 땅
고성은 김말로가 세운 소가야의 옛 땅이다. 말로왕 때부터 이형왕에 이르기까지 아홉 임금이 461년 동안 다스린 부족국가가 있었던 곳이다.
읍의 초입에 자리 잡은 무기산 송학동고분군(사적 제119호)으로 간다. 이곳엔 모두 7기의 무덤이 있다. 소가야의 왕족과 장군의 무덤이라고 한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무덤이 1호 무덤이다. 돌무덤방을 만든 뒤 흙을 쌓아 구릉처럼 만든 가야 고유의 형식이다. 나머지 무덤들은 1호 무덤을 보호하는 딸린무덤이다.
산책로 꼭대기에 이르자 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왠지 쓸쓸한 느낌이 드는 소읍의 분위기가 느릿느릿 가슴속으로 걸어 들어온다. 고성청년회의소 뒤 해발 40m 정도 되는 당산(堂山)을 오른다. 이 산의 남쪽 밭과 언덕이 동외동패총이 있던 자리다.
패총은 선사시대에 사람들이 버린 조가비나 쓰레기들이 쌓여 이뤄진 생활쓰레기장이다. 이 패총에선 각종 토기,동물뼈로 만든 화살촉,중국 한나라의 거울조각,철기류,불탄 쌀,사람 뼛조각 등이 출토됐다. 원삼국문화의 발전과 당시 생활상 및 중국과의 교류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들이다. 행여나 패총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을까 하여 주위를 샅샅이 살피면서 정상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사방엔 벌겋게 맨몸을 드러낸 밭뿐이다.
선사시대 사람들의 단순소박한 패총을 볼 적마다 생각하곤 했다. 오늘날의 우리가 얼마나 무분별한 소비자이자 욕망 덩어리인가. 후끈거리는 지열을 타고 어디선가 조개껍질 타는 듯한 퀴퀴한 냄새가 풍겨왔다.
고성의 아이콘은 공룡이 아닌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오광대다. 탈박물관으로 향한다. 들머리에 이르자 수십 개의 장승이 달려 나와 나그네를 환영한다. '장승해탈묘지'라 새겨진 장승에 시선이 꽂힌다. 무생물인 장승에도 무덤은 필요하다는 못 말리는 휴머니티! 고성오광대 놀이는 문둥이춤 · 오광대춤 · 중춤 · 비비춤 · 제밀주춤 5마당으로 이뤄져 있다. 양반 계층의 위선과 형식에 치우친 윤리를 익살과 해학을 통해 조롱함과 동시에 서민 생활의 고달픔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이는 민중극이다. 전시실에서 만난 검붉은 바탕에 희끗희끗한 종기가 두드러진 문둥이 탈이 서러웠다.
정화불교의 화신 청담 스님의 출가 사찰
고성읍을 떠나 연화산 기슭 옥천사로 향한다. 덧없는 한 생각이 일어난다. 어쩌면 쓸쓸함도 절실하기만 하면 훌륭한 관광자원이 될 수 있겠다. 조선후기의 대표적 건물인 옥천사 자방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중보에 그려진 비천상과 비룡상이 마치 살아 꿈틀거리는 듯 생동감 있다.
대웅전으로 오르는 돌층계 옆,탐스러운 꽃을 피웠던 자국을 채 지우지 못한 불두화가 지난 봄을 아쉬워하고 있다. 쯧쯧,절집에 살면서 여태 제행무상도 깨우치지 못하다니! 전각들 중에서 한 명이 겨우 들어가 좌정할 수 있는 크기의 독성각 · 산령각이 이채롭다. 그렇지,인간이란 존재는 불편해야만 각성할 줄 알지.
옥천각에서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유물전시관인 보장각으로 간다. 첫머리에서 청담 스님의 영정과 눈이 마주친다.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옥천사는 근래의 뛰어난 선승인 청담 스님이 입산한 절로 알려졌다. 1911년 일본 총독부가 '사찰령'을 제정한 이래 이 땅은 왜색불교가 대세를 이뤘다. 1954년부터 청담 스님은 이를 바로잡고자 동산 · 효봉 · 금오 스님 등과 함께 불교정화운동을 시작했다.
청담 스님은 "성불을 한 생 늦추더라도 불교 유신을 달성해야겠다"고 했던 정화불교의 화신이었다. 1971년 11월15일 서울 도선사에서 입적하셨다.
법정 스님은 동아일보에 기고한 '청담 스님의 입적을 곡함'이란 애도문에서 "스님! 마음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그 뜻을 알면서도 빈 공간이 마른바람 소리로 들립니다. 부재중! 그것은 비단 스님의 방만이 아닙니다. 오늘의 한국 불교 자체가 때로는 부재중입니다. '부재'의 표지를 떼어 버리려고 한결같이 골몰하시던 스님은 가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비탄이 아니라 그 뜻을 받들어 화합정진하는 일입니다"라며 스님의 입적을 애도했다. 청담 스님이 적멸에 드신 지 40년,한국 불교는 마침내 정화의 정수리에 이르렀는가.
공룡은 지금도 살아 있는 은유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산수는 정신을 즐겁게 하고 감정을 화창하게 하는 것(山水也者可以怡神暢情者也)이라고 했다. 내 감정의 화창한 열림을 위해 상족암을 찾아간다. 천연기념물 제411호 상족암(床足岩)은 자연경관이 뛰어날 뿐 아니라 중생대 백악기의 공룡과 새 발자국 등 생물의 흔적도 살필 수 있는 곳이다.
어쩌면 상족암은 연안의 수심이 얕아서 변변한 항구 하나 발달하지 못한 고성 땅에 조물주가 베푼 보상인지도 모른다. 덕명리에서 해안을 따라간다. 파도가 야금야금 깎아 먹은 해식애(海蝕崖)가 마치 떡시루에 켜켜이 쌓인 시루떡 같다. 기암괴석 앞에 펼쳐진 너럭바위에 점점이 찍힌 공룡 발자국들이 나그네를 백악기의 원시로 이끈다.
1억여 년 전,이곳은 공룡들이 집단 서식하던 호숫가 늪지대였다. 공룡이 남긴 발자국 위로 쌓인 퇴적층은 시나브로 암석이 되어갔다. 그 뒤 지층이 솟아오르고 위를 덮고 있던 퇴적층이 쓸려 나가자 공룡 발자국이 햇볕 아래 드러났다.
탐방은 제전마을에서 끝이 났다. 덕명리로 되돌아 오는 길에 공룡 혹은 원초적 생명의 힘이 지상을 누볐던 원시를 생각했다. 공룡은 결코 화석화된 개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생한 은유다. 거대화를 지향하는 문명,자유로운 개성을 용납하지 않는 조직….인간에겐 잃어버린 원시에 대한 향수가 있고 그 향수를 이미지화된 공룡을 통해 만족시키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정작 공룡의 경고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몸집이 큰 것들은 환경 변화에 즉각 대응하지 못한다. 공룡처럼 지구에서 퇴출되지 않으려면 인간은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져야 한다.
고성은 반성하고 싶을 때 찾아오고 싶은 곳이다. 한려해상을 지나온 햇살이 거침없이 가슴을 찔러온다. 오늘,이 상족암 바닷가에 부서지는 햇살은 왜 이리 손가락이 긴가.
안병기 여행작
찾아가는 길
◆자가용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경부고속도로 대전IC 지나 비룡분기점 우회전→대전~통영 간 고속도로(35번 고속도로)→고성IC→14번 국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서울 남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고성시외버스터미널까지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10회 운행. 소요 시간 4시간 40분.
맛집
고성읍 대진한정식(055-672-4844).잡채·구이·수육·해물까지 한상 그득하다. 꽃게탕과 가오리무침도 따라 나온다.
여행 팁
고성에서 다도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기 가장 좋은 곳으로는 신라 화랑들이 수련장으로 사용했다는 무이산(청량산,548.5m) 자락의 문수암을 꼽는다. 구불거리는 산간 도로를 따라 문수암에 닿아 해넘이를 바라보면서 생의 에필로그를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왜 해돋이보다 해넘이가 더 숭고한지 알게 된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거류면의 엄홍길 전시관을 찾아가보자.엄홍길씨가 16년 동안 히말라야 8000m 14좌를 완등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아이들에게 도전정신을 일깨워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