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군의 인물됨을 평가해 그 밑에 있을 자리가 아니면 과감히 버리고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결단의 소유자들 가운데 손꼽히는 인물이 순욱이다. 위나라 창업공신인 그는 곽가와 정욱을 조조에게 추천해 등용케 했으며 천하의 흐름을 정확히 읽어내는 안목을 갖췄다. 비록 말년에 주군의 역린(逆鱗)을 건드려 근심 속에 죽었지만 확고한 소신과 명분으로 거의 20여년간 조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 '순욱전(荀彧傳)'에 의하면 그의 자는 문약(文若)이다. 영천(潁川) 영음(潁陰) 사람이다. 조부 순숙(荀淑)은 순제(順帝)와 환제(桓帝) 때 세상에 이름을 떨쳤고 팔룡(八龍)이라고 부를 만큼 뛰어난 자식들도 여덟이나 두고 있었다. 순욱의 부친도 제남국(濟南國) 재상을 지낸 명문가의 자손이다.

그런 그가 당시 북방 원소의 모사로 있었으나,겪으면 겪을수록 의심이 많고 우유부단한 스타일에 실망해 스물아홉 살의 나이에 조조에게 귀의하기로 결단을 내린다. 환관 출신으로 조정 기반이 약한 조조는 순욱을 "나의 장자방(張子房)"이라고 극찬하며 위나라 창업의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된다.

순욱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조조와 원소의 일전인 관도대전에서 공융(孔融) 등 대다수의 모사들 뿐 아니라 조조마저 회의적으로 판단하는 상황을 일거에 잠재우고 넓은 영토와 강성한 군대,모사 전풍과 허유,충신 심배와 봉기,용장 안량과 문추 등 막강한 인재군을 거느린 원소를 무너뜨린 전략가였다.

당시 조조의 군사는 원소의 10분의 1 정도로 1만명이 채 못 됐다. 그중 부상을 입은 자가 2000~3000명에 달했고 군량미도 떨어져가고 있던 다급한 상황이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조조는 순욱에게 편지를 보내 수도인 허도로 돌아갈 방법을 상의했다. 이때 순욱은 이런 답장을 보냈다.

"상대를 제압하지 못하면 반드시 짓밟히게 되니,지금이야말로 천하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시기입니다. 더구나 원소는 평범한 일개 우두머리에 불과하므로 인재를 모아도 쓸 줄은 모릅니다. 공 '조조'의 뛰어난 무용(武勇)과 밝은 지혜에 의지하고 천자의 이름을 받들어 원소를 토벌한다면 어찌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순욱전)

그러면서 네 가지 승리의 당위성을 제시했으니 재능에 따라 적당한 자리를 주는 공정함,결단력과 임기응변의 전략,신상필벌의 엄격함,천하의 인재들을 몰리게 하는 인덕 등이 조조에게는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판단력에 조조는 결전을 마음먹고 천하쟁패를 위한 전쟁을 하게 된다.

결국 원소는 휘하의 많은 인재들을 등용하지 못하고 심지어 세 아들과도 불화하는 등 인화에 실패해 관도대전에서 대패,죽음을 맞이한다. 역으로 조조는 북방의 요충지를 거의 장악하게 된다.

모든 것이 잘 되어가던 건안 17년(212년)에 동소(董昭) 등은 조조의 작위를 국공(國公)으로 올리고 구석(九錫)의 예물을 갖추어 그의 뛰어난 공훈을 표창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은밀히 순욱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러나 순욱은 신하의 명분을 강조하면서 반대한다. 이런 일로 인해 조조는 순욱을 멀리하게 되었다고 정사는 적고 있다.

물론 조조가 막내인 조식을 후계자로 정하는 문제로 상의했을 때에도 순욱은 적장자론을 내세워 조비를 세워야 한다고 간언한 적이 있어 조조는 내심 불편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의도적인 내침을 당한 순욱은 나이 쉰에 근심 속에 죽음을 맞이한다. 소설 《삼국지》에서는 조조가 눈엣가시인 순욱에게 밥그릇이 빈 밥상을 하사해 순욱이 조조의 의중을 알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자살하는 장면으로 처리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는 나관중이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김원중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wjkim@ko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