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여행] (2) 경남 통영‥굴곡진 역사…그곳엔 문학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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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의 고향
박경리·유치환·윤이상의 고향…근대사 뒤안길 묵묵히 지키며 수많은 문학 작품에 영감 줘
청마의 20년 연애편지…백석 詩 속 그녀, 섬마다 사연들도 그리 많아
박경리·유치환·윤이상의 고향…근대사 뒤안길 묵묵히 지키며 수많은 문학 작품에 영감 줘
청마의 20년 연애편지…백석 詩 속 그녀, 섬마다 사연들도 그리 많아
오늘은 여황산 기슭 세병관에서 여정을 시작한다. 들머리를 지키는 벅수(장승)와 눈인사를 나눈 뒤 '전쟁(戈)을 그친다(止)'는 뜻인 지과문을 지나자 세병관이 나타난다. 1603년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이 지은 통제영의 중심 건물로 정면 9칸 · 측면 5칸 팔각지붕 형태의 당당함을 풍기는 건축이다.
'세병'이란 이름은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세병마행(洗兵馬行)'의 마지막 구절 '정세병갑장불용(淨洗兵甲長不用)에서 빌어온 것이다. 안녹산의 난 때 적군에게 포로가 되는 등 전쟁에 시달렸던 두보의 바람이 묻어나는 시다.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충렬사 외삼문을 들어서자 거대한 동백나무가 나그네를 맞는다. 수령 300년이 넘었다는 이 나무는 밑동 둘레만 1.7m에 달한다. 이 나무가 혹 이순신 장군의 후생(後生)이 아닐까. 충렬사 중앙에는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좌우에는 명나라 신종이 충무공에게 내린 여덟 가지 선물(팔사품 · 八賜品)을 그린 병풍 8폭이 펼쳐져 있다. 장군의 얼굴이 평안해 보인다.
건물 양옆에는 금목서 두 그루가 마치 사당을 호위하듯 서 있다. 중국이 고향인 이 나무는 10월에 주황색 꽃을 피우는데 향기가 너무 강렬해 꽃차를 만들 때는 녹차를 섞어 쓴다. 강한루 뒤 돌계단을 밟고 내려오다가 문득 백석의 시 '통영'이 생각났다. 시인은 왜 통영까지 와 이곳에서 가까운 명정골에 산다는 란이라는 처녀를 생각하면서 청승맞게 이 돌계단에 앉아 있었던 걸까.
◆윤이상,박경리,유치환 등 예술가의 고향
미륵산 자락의 박경리 선생 묘소를 찾았다. 통영 문화동 328에서 태어난 선생(1926~2008)은 생전에 《불신시대》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 《토지》 등 숱한 작품을 발표했다. 그 중에서도 동학농민전쟁과 갑오개혁,을미의병,일제강점기 등이 차례로 할퀴고 지나간 우리 근대사의 뒤안길에서 우리 민족과 민중이 겪었던 고난을 형상화한 대하소설 《토지》는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묘소로 오르는 길섶엔 '옛날의 그 집' 등 시와 산문을 새긴 문학비들이 연달아 서 있다. 묘소에 서자 저 멀리 산양읍 신봉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을이 내려다보여서 조금은 덜 쓸쓸하시겠구나. 선생이 생전에 낸 4권의 시집 속엔 굴곡진 삶의 내용이 오롯이 드러나 있다.
'글기둥 하나 잡고/ 내 반평생/ 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이었네// 아무도 무엇으로도/ 고삐를 풀어주지 않았고/ 풀 수도 없었네// 영광이라고도 하고/ 사명이라고도 했지만/ 진정 내겐 그런 것 없었고// 스치고 부딪치고/ 아프기만 했지/ 그래,/ 글기둥 하나 붙잡고/ 여까지 왔네.'(시 '눈먼 말')
지난달 5일 문을 연 박경리기념관에 들렀다. 지하 1층~지상 1층,가운데가 뚫린 사각형 모양의 건물이다. 개관을 너무 서두른 게 아닐까. 《토지》 친필 원고와 여권,편지 등의 유품과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 나오는 마을을 복원한 모형 등을 빼고는 볼 게 없다. 동행했던 풍수지리연구가 김대환 선생이 "기념관이 들어선 자리가 빗물이 모이는 물골인데 왜 여기에 세웠는지 모르겠다"고 한마디 한다. 찬찬히 살펴보니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중앙시장 부근에 있는 유치환 시인(1908~1967)의 생가터를 찾아간다. 생가 자리엔 '고운통영누비'집이 들어서 있다. 건물 귀퉁이에 세워진 대리석 표석이 지난날을 증거할 뿐.그런데 망일봉 기슭의 청마문학관 위쪽에 복원했다는 '생가'는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청마가 이영도 여사에게 20년 동안 편지를 부쳤던 중앙동우체국으로 향한다. 우체국 정문 계단 옆에는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라는 '행복' 시비와 용도폐기의 운명에 처한 빨간 우체통이 동병상련의 눈빛을 주고받으며 나란히 앉아 있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항남동 뚱보할매김밥집에서 김밥을 먹었다. 고명을 넣지 않은 맨밥 김밥에 어슷어슷 썬 무김치와 오징어볶음이 곁들여졌다. 1995년 작고한 어두이씨가 1947년부터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담백한 맛이 딱 내 스타일이다.
◆전쟁터에서도 오롯이 지켜냈던 인간성
서호동 여객선 터미널에서 한산도행 배를 탔다. 병선마당 선착장에 매여 있던 거북선이 저만치 앞서 가고 있다. 거북선이 10여척의 해양소년단 보트를 호위하며 따라가는 풍경은 보기 드문 장관이었다. 한산도 제승당(制勝堂)은 이순신 장군의 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정유재란 때 원균의 패전으로 폐허가 된 지 142년 후 조경 통제사가 막료 장수들과 작전회의를 하던 옛 운주당 터에 집을 짓고 '제승당'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지금의 제승당과 충무사 · 한산정 · 수루 등은 1976년에 지은 것이다.
400여년 전 장군이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던' 수루에 올라 앞바다를 바라본다. 한산대첩 당시 장군은 견내량에 있던 적선 70여척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고 학익진을 써 왜선 59척을 격파했다. 이로써 왜군들의 수륙병진작전에 제동을 걸었으며,조선 수군은 남해의 해상권을 확실히 장악하게 되었다.
전쟁이 잔인한 것은 아마도 인간성을 철저하게 파괴한다는 점일 것이다. 장군은 《난중일기》의 총 1491일 중 1028일간의 일기와 여러 편의 시를 이곳에서 썼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시를 썼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도 자신의 인간성을 지키려 노력했다는 뜻이다. 그것이 장군의 위대성을 더욱 빛나게 한다. 수루 너머 한산도 앞바다 거북등대가 내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안병기 < 여행작가 >
●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비룡JC→산내JC→35번 통영대전고속국도→동통영IC→통영
'세병'이란 이름은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세병마행(洗兵馬行)'의 마지막 구절 '정세병갑장불용(淨洗兵甲長不用)에서 빌어온 것이다. 안녹산의 난 때 적군에게 포로가 되는 등 전쟁에 시달렸던 두보의 바람이 묻어나는 시다.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충렬사 외삼문을 들어서자 거대한 동백나무가 나그네를 맞는다. 수령 300년이 넘었다는 이 나무는 밑동 둘레만 1.7m에 달한다. 이 나무가 혹 이순신 장군의 후생(後生)이 아닐까. 충렬사 중앙에는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좌우에는 명나라 신종이 충무공에게 내린 여덟 가지 선물(팔사품 · 八賜品)을 그린 병풍 8폭이 펼쳐져 있다. 장군의 얼굴이 평안해 보인다.
건물 양옆에는 금목서 두 그루가 마치 사당을 호위하듯 서 있다. 중국이 고향인 이 나무는 10월에 주황색 꽃을 피우는데 향기가 너무 강렬해 꽃차를 만들 때는 녹차를 섞어 쓴다. 강한루 뒤 돌계단을 밟고 내려오다가 문득 백석의 시 '통영'이 생각났다. 시인은 왜 통영까지 와 이곳에서 가까운 명정골에 산다는 란이라는 처녀를 생각하면서 청승맞게 이 돌계단에 앉아 있었던 걸까.
◆윤이상,박경리,유치환 등 예술가의 고향
미륵산 자락의 박경리 선생 묘소를 찾았다. 통영 문화동 328에서 태어난 선생(1926~2008)은 생전에 《불신시대》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 《토지》 등 숱한 작품을 발표했다. 그 중에서도 동학농민전쟁과 갑오개혁,을미의병,일제강점기 등이 차례로 할퀴고 지나간 우리 근대사의 뒤안길에서 우리 민족과 민중이 겪었던 고난을 형상화한 대하소설 《토지》는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묘소로 오르는 길섶엔 '옛날의 그 집' 등 시와 산문을 새긴 문학비들이 연달아 서 있다. 묘소에 서자 저 멀리 산양읍 신봉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을이 내려다보여서 조금은 덜 쓸쓸하시겠구나. 선생이 생전에 낸 4권의 시집 속엔 굴곡진 삶의 내용이 오롯이 드러나 있다.
'글기둥 하나 잡고/ 내 반평생/ 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이었네// 아무도 무엇으로도/ 고삐를 풀어주지 않았고/ 풀 수도 없었네// 영광이라고도 하고/ 사명이라고도 했지만/ 진정 내겐 그런 것 없었고// 스치고 부딪치고/ 아프기만 했지/ 그래,/ 글기둥 하나 붙잡고/ 여까지 왔네.'(시 '눈먼 말')
지난달 5일 문을 연 박경리기념관에 들렀다. 지하 1층~지상 1층,가운데가 뚫린 사각형 모양의 건물이다. 개관을 너무 서두른 게 아닐까. 《토지》 친필 원고와 여권,편지 등의 유품과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 나오는 마을을 복원한 모형 등을 빼고는 볼 게 없다. 동행했던 풍수지리연구가 김대환 선생이 "기념관이 들어선 자리가 빗물이 모이는 물골인데 왜 여기에 세웠는지 모르겠다"고 한마디 한다. 찬찬히 살펴보니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중앙시장 부근에 있는 유치환 시인(1908~1967)의 생가터를 찾아간다. 생가 자리엔 '고운통영누비'집이 들어서 있다. 건물 귀퉁이에 세워진 대리석 표석이 지난날을 증거할 뿐.그런데 망일봉 기슭의 청마문학관 위쪽에 복원했다는 '생가'는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청마가 이영도 여사에게 20년 동안 편지를 부쳤던 중앙동우체국으로 향한다. 우체국 정문 계단 옆에는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라는 '행복' 시비와 용도폐기의 운명에 처한 빨간 우체통이 동병상련의 눈빛을 주고받으며 나란히 앉아 있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항남동 뚱보할매김밥집에서 김밥을 먹었다. 고명을 넣지 않은 맨밥 김밥에 어슷어슷 썬 무김치와 오징어볶음이 곁들여졌다. 1995년 작고한 어두이씨가 1947년부터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담백한 맛이 딱 내 스타일이다.
◆전쟁터에서도 오롯이 지켜냈던 인간성
서호동 여객선 터미널에서 한산도행 배를 탔다. 병선마당 선착장에 매여 있던 거북선이 저만치 앞서 가고 있다. 거북선이 10여척의 해양소년단 보트를 호위하며 따라가는 풍경은 보기 드문 장관이었다. 한산도 제승당(制勝堂)은 이순신 장군의 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정유재란 때 원균의 패전으로 폐허가 된 지 142년 후 조경 통제사가 막료 장수들과 작전회의를 하던 옛 운주당 터에 집을 짓고 '제승당'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지금의 제승당과 충무사 · 한산정 · 수루 등은 1976년에 지은 것이다.
400여년 전 장군이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던' 수루에 올라 앞바다를 바라본다. 한산대첩 당시 장군은 견내량에 있던 적선 70여척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고 학익진을 써 왜선 59척을 격파했다. 이로써 왜군들의 수륙병진작전에 제동을 걸었으며,조선 수군은 남해의 해상권을 확실히 장악하게 되었다.
전쟁이 잔인한 것은 아마도 인간성을 철저하게 파괴한다는 점일 것이다. 장군은 《난중일기》의 총 1491일 중 1028일간의 일기와 여러 편의 시를 이곳에서 썼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시를 썼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도 자신의 인간성을 지키려 노력했다는 뜻이다. 그것이 장군의 위대성을 더욱 빛나게 한다. 수루 너머 한산도 앞바다 거북등대가 내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안병기 < 여행작가 >
●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비룡JC→산내JC→35번 통영대전고속국도→동통영IC→통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