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스갯소리로 '삼식이'시리즈가 있다. 집에서 한 끼를 먹으면 '일식님',두 끼를 먹으면 '두식군',삼시 세 끼를 다 먹으면 '삼식놈'이라고 한단다. 웃자고 하는 소리지만 집안에서조차 대우받지 못하는 은퇴 노년 남성의 서글픈 처지를 보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서러운 신세가 되지 않기 위해 요즘 은퇴설계에 대한 장년층의 관심이 높다.

그런데 정작 그들의 고민을 들어보면 대부분 '돈' 문제에 머무르고 있다. 대부분의 은퇴 관련 계획이 잔여수명 기간 중 먹고 쓸 돈의 양을 퇴직시점까지 뼈 빠지게 벌어서 확보해야 한다는 수준이다. 하지만 이는 은퇴설계의 알맹이가 아닌 껍데기에 불과하다. 앞으로 예상되는 평균수명을 감안해볼 때 정년퇴직 후 약 30년 동안 '먹고 사는데 얼마가 필요한가'가 아니라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빠져 있어서다.

◆'퇴직=은퇴' 등식을 깨자

이제는 은퇴 후에도 약 30년을 살아야 한다. 그동안 살아온 인생의 절반가량이 남는 셈이다. 시간으로 따지면 약 26만여 시간을 '삼식이,뒷방 늙은이,손자 봐주는 노인.등산…' 등으로 존재감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여유로운 은퇴가 아니라 축복받은 30년을 낭비하는 것이다.

먼저 '퇴직=은퇴'라는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 직장에서의 정년은 대학졸업과 같다. 대학졸업이 학생으로서의 한 인생 주기를 마감하고 직장인으로 발돋움하는 계기라면 정년은 직장인 인생의 주기를 마감하고 인생의 절정기로 접어드는 두 번째 졸업이다.

젊은 시절만큼의 패기와 근력은 줄겠지만 경쟁력 있는,당당한 사회의 구성원이다. 깊이 패인 주름은 연륜의 계급장이고 돋보기는 지혜로운 혜안이며 느린 걸음은 세상에 대한 겸손한 리스크 관리다. 이것이야말로 젊은이들이 절대 따라올 수 없는 차별화된 경쟁력이 아닌가. 은퇴설계는 사회로부터 후퇴하는 준비가 아닌,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새로운 주역이 되는 대비를 하는 것이다.

◆즐길 수 있는 직업을 찾아라

은퇴 후에도 계속되는 현금 흐름은 크고 작음을 떠나 정신건강에 매우 도움이 된다. 퇴직 시점에서 돈이 많아 은행에 넣어두고 곶감 빼먹듯이 살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자녀와 손자 걱정,병원비 걱정 등 끊이지 않는 불안감으로 대부분 죽을 때까지 원금을 건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몇 푼 되지 않는 이자로 생활하려니 항상 부족하고 불안하다. 이럴 때 직업을 통해 얼마라도 꾸준히 수입이 발생하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생활도 안정된다. 비록 수입은 적더라도 생의 마지막 직업만큼은 진정으로 즐길 수 있는 직업을 찾아야 한다. 젊은 시절 가족에 헌신하느라 접었지만 너무나도 하고 싶었던 낭만적인 꿈이 있다면 이젠 미루지 말고 실현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아야 한다.

노후를 여유 있게 보낼 만큼 충분한 자산이 있다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행할 수 있는 자선사업을 고려해볼 만하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삶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삶보다 훨씬 더 보람차다. 100억원 정도 자산을 가진 고객 중 한 분은 현재 장학재단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장학재단뿐 아니라 기부 등 자선사업을 벌일 수 있는 대상은 많다. 자산을 활용한 자선사업은 사전에 가족들과 상의해 결론을 내려야 한다.

자산이 충분하지 않더라도 노후 생활을 할 수 있는 정도가 된다면 몸으로 할 수 있는 사회봉사 활동도 많다. 자신이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나 단체를 알아보고 자신의 능력에 알맞은 활동을 정할 수 있다. 자신의 경험과 연륜을 살릴 수 있는 청소년 상담,갈등 예방 프로그램 등 봉사활동을 할 수도 있다.

◆취업 준비생처럼 훈련하고 준비하라

지금은 직장 일에 바쁘니 계획만 세워두고 "퇴직하면 그 때부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은 최소 5년 이상 미리 준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프랜차이즈 설명회를 다니며 뒤늦게 생업을 찾아 헤매게 될 것이다. 좋은 학교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던 것처럼 본격적인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하기 위해 미리 현직에 있는 동안 대비해야 한다.

취미 공부 수준이 아니라 취업 준비생처럼 계획하고 추진해야 한다. 손재주가 좋다면 공방을 다니고 역사를 좋아하면 역사 알리미 자격증에 도전하고 부동산에 흥미가 있다면 젊을 때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야 한다. 사람이 좋아 평소 주변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성격이라면 심리학공부를 통해 심리치료사 준비를 하는 것도 좋다.

◆친구 가족과의 관계를 복원하라

퇴직 후 가장 큰 문제는 외로움이다. 바쁜 직장의 일상이 사라진 그 공백을 취미생활로 메운다 해도 마음을 의지할 사람이 없으면 무척 쓸쓸하고 불행하다. 능력을 높이 사주는 직장과 유유상종으로 모이는 친구와 지인들이 막상 퇴직 후에도 현재 관계가 유지될지 곰곰이 생각해보자.이 관계를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이런 네트워크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자연스럽게 만나는 관계이지만 퇴직 후 나의 처지가 바뀌면 그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이 인지상정.그렇다면 퇴직 후 내 이름 뒤에 모든 직함이 사라져도 이해관계 없이 계속 만날 수 있는 지인은 누구인지 돌아보자.직장에서의 성공을 위한 10년용(?) 네트워크 강화도 중요하지만 약 30~40년을 같이할 순수 네트워크 강화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늙고 힘없을 때 마지막 남는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이다. 가족을 위해 열심히 직장에 헌신했지만,정작 그 가족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얼마나 투입했는지 되돌아 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아내와 자녀들과의 대화부족으로 인해 관계가 좋지 않다면 퇴직 후 삼식이의 억울한 처지가 될 수 있다. 가족에 대한 평생 헌신이 본전도 못 건지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좀더 많은 시간을 내서 가족과 대화하고 소통해야 한다. 때로는 자녀에게 사과하고 배우자의 서운한 마음을 달래서 화목한 가정을 복원해야 한다.

완벽한 은퇴 재무설계가 무슨 소용인가. 같이 웃을 가족이 없고,소주 한 잔 기울일 친구가 없고,아침에 눈을 뜨게 하는 즐거운 일이 없다면.성수기는 비수기에만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손민보 신한은행 도곡 PB센터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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