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과 2005년.'대만 사람들은 한국을 얘기할 때 이 두 해를 빼놓지 않는다. 1992년 한국은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과 공식 외교 관계를 끊었다. 2005년은 대만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건국 이래 처음으로 한국에 뒤처진 해다.

지난달 말 세계 3위 디스플레이업체인 대만 AU옵트로닉스(AUO)의 이근야오 회장은 현지 유력 일간지 '자유시보'를 통해 작심한 듯 삼성을 공격했다. "대만 LCD 업체가 미국에서 담합 판정을 받아 수억달러의 벌금을 물게 된 데는 삼성의 '밀고'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대만의 '한국 경계령'이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국가 연구개발(R&D) 총괄센터인 대만 공업기술연구소(ITRI)는 삼성전자를 상대로 특허 침해 소송을 잇따라 제기하고 있다. 반대로 일본 · 대만 기업 간 연합 사례가 많아지는 등 이들 두 나라 사이는 밀월 관계가 깊어지고 있다.

◆대만, 한국 상대 특허 분쟁 공세

ITRI는 지난해 6월19일과 10월19일 두 차례 미국 아칸소주 서부지법에 삼성전자를 상대로 총 7건의 소송을 냈다. 대부분 특허와 관련한 것으로 휴대폰,반도체,디스플레이 등 해당 분야는 전방위적이다. ITRI는 1973년 설립된 국영 R&D센터로,세계 1,2위 반도체 파운드리업체인 TSMC와 UMC도 ITRI로부터 기술을 이전받아 성장했다. ITRI는 삼성전자가 특허를 의도적으로 침해했다며 특허 가치의 세 배에 달하는 손해 배상금과 모든 소송 비용을 지급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 관계자는 "대만 입법부 등에서 ITRI 무위론이 흘러나오자 ITRI가 삼성을 겨냥한 특허 소송으로 위기를 돌파하려는 것"이라며 "소송 대상이 된 특허도 대부분 범용 기술"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ITRI가 대만 정부가 운영하는 국영 연구기관이라는 점에서 삼성도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맞소송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대만과 한국 간 특허 다툼은 반도체,LCD 분야에 걸쳐 수차례 이뤄졌다. LG디스플레이와 AUO 간 분쟁이 절정이다. 2006년 LG디스플레이가 AUO를 상대로 미국 연방법원에 제소,선공을 펼쳤지만 이달 초 미국 법원은 AUO의 손을 들어줬다. 업계에선 ITRI가 삼성전자에 소송을 낸 것도 이 같은 자신감에 근거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민호 KOTRA 타이베이 무역센터장은 "최근 TSMC의 고위 인사를 만났을 때 삼성전자가 기술과 인력을 빼간다며 비판하는 얘기를 한참 들었다"며 "삼성 등 국내 업체가 대만의 텃밭인 파운드리,비메모리 분야에 진출하려 하자 이를 경계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반도 긴장 대만 기업엔 기회(?)

지난달 25일 저녁 9시,대만 유력 뉴스채널 TVBS의 간판 시사 프로그램에 '천안함 사태'가 주제로 등장했다. 이날 대만 증시는 전일보다 3.5% 크게 떨어졌다. 정치인 등 패널들은 "한반도 긴장에 왜 대만이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느냐.오히려 대만 기업에 유리하다"고 열변을 토했다. 남북한 전쟁 가능성을 분석하는 요란한 차트까지 동원됐다.

대만의 중장기 경제계획 담당 부처인 경제건설위원회의 류이루 위원장도 이 같은 분위기를 거들었다. "남북한 위기가 대만 경제에 유리할 수 있다"는 요지의 발언까지 했다. 반면 이건희 회장의 경영 복귀 이후 지난달 삼성이 대규모 반도체 투자 계획을 발표하자 대만 언론들은 일제히 "대만 D램 산업은 망할 것"이라며 경계감을 드러냈다.

전문가들은 지난해 대만의 환율 변화를 봐도 대한(對韓) 경계령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달러와 1 대 32 안팎에서 움직이던 대만달러는 지난해 3월 갑자기 1 대 36까지 급등했다. 당시 한국은 원 · 달러 환율 상승에 힘입어 주요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이고 있었다. 이 센터장은 "공식 발표한 적은 없지만 누구나 대만 정부가 한국을 겨냥해 외환 시장에 개입했다고 짐작했다"며 "당시 정부 관계자를 만났을 때 1 대 40까지도 용인할 것이란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대만의 대표적 산업 클러스터인 신주과학단지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는 김철호씨(46)는 지난해 겪은 쓰라린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TSMC 등 유력 기업들이 직원의 40%가량을 정리한 탓에 가뜩이나 손님이 줄어든 상황에서 남아 있는 근로자들마저 위기의 원인을 한국으로 돌리며 발길을 끊어 매상이 절반으로 줄기도 했다는 것.당시 대만 산업계에는 삼성전자와 LG전자에 '파이'를 뺏겼다는 감정이 팽배했다.

◆中 · 灣 · 日 3각 협력

한 · 대만 간 신경전이 치열한 가운데 일본은 대만을 지렛대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지난달 28일 마루베니상사는 대만 대성그룹,중국 량요그룹과 공동으로 상하이에 1억위안 규모의 합작 식품공장을 설립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중국+대만을 뜻하는 '차이완(Chiwan)'에 일본까지 가세하는 3각 협력구도가 가시화되는 양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판세 분석이다.

맥도날드를 제치고 중국 햄버거 시장을 평정한 모그버거는 대만 기업이 일본 브랜드를 도입해 성공시킨 사례다. 대만 경제부에 따르면 대만 자동차 시장의 70%가 일본산이고,대만 백화점들은 예외 없이 일본과 합작 형태다. 김헌성 삼성전자 타이베이법인장(전무)은 "일본은 대만을 앞세워 중국 침투를 시도하고,중국은 대만을 자국의 배후 물류 중심으로 활용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타이베이=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