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지식경제부와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27개 국책 연구소(정부 출연 연구소)를 대상으로 통합 등 구조 개편을 추진 중이다. 연구소별로 진행해온 연구 · 개발(R&D)과제를 대형 국가 프로젝트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구상에 따른 것이다. 정부의 구조 개편안은 오는 6월 말께 윤곽을 드러낼 전망이다.

일본은 이미 2001년 경제산업성 산하 15개 국책 연구소를 하나로 묶어 일본산업기술총합연구소(AIST)라는 대형 연구조직을 출범시켰다. AIST는 미쓰비시전기 회장을 지낸 민간 최고경영자(CEO) 출신의 노마구치 다모쓰 이사장(70)이 2009년 4월부터 이끌고 있다.

노마구치 이사장과 지경부 산하 14개 국책 연구소를 총괄하는 한욱 산업기술연구회(ISTK)이사장(63)이 25일 안현실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의 사회로 대담을 가졌다. 노마구치 이사장이 지난 24일 대전에서 열린 '세계 사이언스파크 총회' 참석을 마치고 귀국하는 도중에 김포공항 출국장에서 이뤄졌다.
[韓ㆍ日 산업기술硏 수장에게 듣는다] 국가 R&D기관 ‘선택과 포기’ 필요…대형연구 집중해야
▲사회=국책 연구소들의 R&D 성과가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한욱 ISTK 이사장=버릴 건 과감히 버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선택과 집중'을 얘기하는데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선택과 포기'가 필요하다. 다양한 연구 과제 중 잔가지에 해당하는 것은 과감히 포기하고 국가적으로 필요한 2~3가지의 대형 연구에 집중해야 한다.

▲노마구치 다모쓰 AIST 이사장=맞는 지적이다. 일본에선 불경기가 지속되면서 민간에서 감당하기 힘든 대형 연구 과제를 국가 프로젝트로 강하게 추진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대학의 순수 기초연구를 제품으로 연결시키는 중간자적 역할을 국책 연구소가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사회=대형 연구과제에 집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한 이사장=지금과 같은 칸막이식 연구 조직으론 한계가 있다. 수요자 중심의 융합형 R&D에 적합한 시스템이 필요하다. 국책 연구소들이 대형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연구거점화 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

▲사회=일본 국책 연구소는 '통합형'이고 한국은 '분산형'이다. 어떤 형태가 정답인가.


▲한 이사장=정답은 시대상황에 따라 다르다. 한국은 과거 30여년간 선진 기술을 따라잡아야 했다. 이럴 때는 분산형이 맞다. 개별 생산기술에 집중할 수 있고 연구소끼리 경쟁이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한국은 이미 선진 기술을 80~100% 따라잡았다. '추격형 R&D'를 벗어나 '선제형 R&D'로 도약하려면 기존의 칸막이식 연구조직을 바꿔야 한다.

▲노마구치 이사장=일본이 국책 연구소를 통합한 것도 각 기술분야의 장벽을 허물고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가 교류해야 혁신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회=일본의 국책 연구소 통합 과정은 어땠나.


▲노마구치 이사장=처음 통합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90년대 후반이다. 여러 분야 연구를 융합하고 연구의 스피드를 높이자는 취지였다. 논의 초기에는 불안해하는 연구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통합을 통해 예전에 비해 대형 과제에 연구 역량을 쏟아부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면서 연구자들의 자부심도 높아졌다.

▲사회=한국에선 정부 부처 간 경계를 뛰어넘는 국책 연구소 구조개편 작업이 논의되고 있다.


▲노마구치 이사장=일본에서 국책 연구소 통합 효과를 정확히 평가하기는 시기상조다. 하지만 AIST 내부에선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다만 한국의 구상은 일본이 했던 것보다 통합 범위가 넓다는 점에서 상당히 야심적인 계획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AIST 연구진에는 외국인도 많다고 들었다.


▲노마구치 이사장=2400여명의 연구자 중 15% 정도가 외국인이다. 국적으로 보면 30여개국 출신이고 그 중 중국과 한국의 연구자가 가장 많다. 미국 카네기멜론대학 등 해외 명문대학이나 연구소에서도 연구자들을 초빙했다. 초빙된 연구자들은 '디지털 휴먼(인간의 행동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연구분야)' 등 새로운 연구분야를 개척하는 데 집중 배치돼 있다.

▲한 이사장=한국에선 국책 연구소에 외국인 연구자가 별로 없다. 개방형 혁신을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한번쯤 생각해볼 대목이다.

▲사회=AIST는 독립 행정법인이라고 들었다. 어떤 의미인가.


▲노마구치 이사장=연구 과제를 정할 때는 정부 정책에 필요한지,어느 정도 부합하는지를 고려하지만 예산과 인사 문제에 대해서는 연구소가 자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절대 방만하게 운영하지는 않는다. 자체 성과 판단 결과 미흡한 분야는 축소하거나 폐지한다.

▲사회=민간기업 CEO 출신을 국가 R&D에 활용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나.

[韓ㆍ日 산업기술硏 수장에게 듣는다] 국가 R&D기관 ‘선택과 포기’ 필요…대형연구 집중해야
▲한 이사장=CEO들의 경험과 미래를 읽는 눈은 정부의 R&D 방향을 잡는 데 분명 도움이 된다. 다만 단기적인 성과가 아니라 중장기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국가 R&D의 핵심주체인 산(産) · 학(學) · 연(硏)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

▲노마구치 이사장=민간기업과 공공부문을 모두 경험해 본 입장에서 보면 산업계와 학계 · 연구소는 R&D의 모티브(동기)가 다른 것 같다. 산업계는 '경영상 필요'가 동기인 데 반해 학계 · 연구소는 '지적 탐구심과 학문상 필요'가 동기가 되고 있다. 기초연구와 제품화 연구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AIST는 세계 수준의 연구소로 정평이 나 있다. 경쟁 상대로 생각하는 연구소가 있나.


▲노마구치 이사장=경쟁 상대라기보다는 협력 상대로 본다. 우리는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세계적 연구소와 협력 관계를 맺고 있고 한국과도 산업기술연구회를 비롯 다양한 연구기관과 협력하고 있다.

▲한 이사장=산업기술연구회와 AIST는 모두 '산업기술 발전'이라는 목표를 갖고 있다. R&D 분야에서 앞으로 양국의 협력을 늘리겠다.

주용석/김영우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