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흥동 경총회관에선 출입카드없이 누구도 엘리베이터를 탈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수시로 점거 농성을 시도하는 노동단체 진입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경총은 재계의 최대 난제인 노사 문제를 도맡아 처리,강성 노동계와 대립각을 세울 수밖에 없다. 때문에 지난 2월 이수영 경총 회장(OCI 회장)이 연임을 고사했을 때 선뜻 후임을 맡겠다는 재계 경영자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 공백이 70일 넘게 이어졌다.

경총은 3일 이희범 STX에너지 · 중공업 총괄회장을 임기 2년의 경총 신임 회장으로 추대했다고 긴급 발표했다. 박승복 샘표식품 회장을 대표로 하는 추대위원회가 고심 끝에 무역협회장을 역임한 이 회장을 추대했고,이달 중순 이 · 취임식을 갖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회장이 수락할 경우 경제단체장을 두 번 역임하는 첫 사례로 기록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불과 3시간 만에 '해프닝'으로 끝났다. 이 회장이 "회사 업무에 전념하기 위해 회장직을 수락하지 않기로 했다"는 입장을 밝혀서다. STX 관계자는 "이 회장이 사전에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는데도 경총 측이 일방적으로 발표했다"며 "이 회장은 수락할 뜻이 없고 그럴 상황도 아니다"고 못을 박았다.

사실 강덕수 STX그룹 회장이 경총 부회장을 맡고 있는 상황에서,계열사 CEO인 이 회장이 경총 회장을 맡는다면 모양새가 너무 나빠질 게 뻔했다. 더구나 경총 회장은 기업 오너(소유주)가 번갈아 맡는 게 그동안의 관행이었다. 자칫 STX 노조를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점이 이 회장의 경총행(行)을 막았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경총이 이 회장 추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추대위원 중 한 사람인 강덕수 STX 회장의 자문이나 양해도 구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추대위원회엔 박 회장과 강 회장 외에 조남욱 삼부토건 회장,이장한 종근당 회장,허동수 GS칼텍스 회장,이상대 삼성엔지니어링 상담역,김창근 SK케미칼 부회장,정지택 두산중공업 부회장,심갑보 삼익THK 부회장,강석진 CEO컨설팅 회장,김영배 경총 상임부회장 등이 참여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경총은 새 회장을 추대하기 위해 회원사뿐만 아니라 당사자들의 의견도 제대로 수렴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현재 경총의 내부 사정은 상당히 어려운 편이다. 이수영 회장이 형식적인 경총 회장직을 맡고 있지만,지난 2월19일 사의를 표명한 이후 완전히 손을 뗀 상태다. 반면 풀어야 할 현안들은 산적해 있다. 오는 7월 노조전임자 급여지급 금지와 내년 복수노조 허용을 앞두고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작년 말 경총에 불만을 품고 탈퇴한 현대 · 기아차그룹은 "복귀할 뜻이 없다"고 거듭 밝히고 있다.

경총 회장이 장기간 공석으로 남아있고 적임자를 찾기가 어려워지면 경총을 아예 전국경제인연합회로 흡수 통합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올 수 있다. 경총은 1970년까지 전경련 산하조직이었다. 재계 관계자는 "이제 경총회장 자리는 전문경영인인 이희범 회장이 고사했던 자리란 딱지가 붙게 돼 앞으로 재계 오너를 추대하기가 더욱 어렵게 됐다"고 지적했다.

조재길 기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