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임자 숫자는 노조권력의 상징이다. 파워가 막강한 노조일수록 전임자도 많다. 여러 계파가 주도권싸움을 벌이며 노조권력을 극대화한 현대차,기아차노조에 전임자가 많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1990년대 중반에만 해도 노조전임자 문제는 노동현장의 최대 이슈거리였다. 강성노조들마다 전임자 증원을 요구했고 이를 거부하는 회사 측과 충돌을 빚기 일쑤였다. 노조는 전임자 한 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파업이란 무기를 사용했고 회사는 한 명이라도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선봉대에 선 대형 강성노조들이 전임자를 요구하며 극렬투쟁을 벌이면 생산차질을 우려한 회사 측은 울며겨자먹기식으로 노조의 요구를 들어주는 식이었다.

이러다보니 우리나라가 세계 최다 전임자를 자랑(?)하는 '전임자 천국'으로 변했다. 전임자가 얼마나 많으면 노조 내 할 일 없이 놀고 먹는 전임자들이 넘쳐날까. 노동운동이 왜곡되면서 전임자는 온건노조에도 필요 이상으로 많아졌다. 현대중공업노조는 현재 전임자의 3분의 1이 필요없다고 한다.

그런데 투쟁을 통해 얻은 과다 전임자가 지금 노동계한테는 효자노릇(?)을 하고 있다. 근로시간면제위원회는 타임오프(근로시간면제) 한도를 정할 때 현장의 전임자실태를 감안하겠다고 밝혔다. 전임자 수가 많으면 그에 비례해 타임오프 한도도 많아진다는 얘기다. 노조권력을 통해 얻은 전임자가 새 노동법의 타임오프 잣대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이러다보니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에선 근면위의 전임자 실태조사결과가 실제보다 적게 나왔다고 항변한다. 보건의료노조 간부 10여명은 지난 23일 근면위 회의가 한창 열리고 있는 노사정위원회 회의실에 몰려와 제대로 된 통계자료를 기준으로 삼아달라고 요구했다. 전임자 수치가 적게 반영됐다는 얘기다.

근면위가 유급으로 인정하려는 타임오프의 인정범위는 글로벌스탠더드를 따라야 한다. 상급단체 파견이나 노조자체교육,조합원모집 등 노조활동은 철저히 노조재정에서 충당토록 해야 한다. 노조 일을 빙자해 생산활동을 등한시하는 대의원들에 대해선 일체 타임오프를 인정해선 안 된다. 임원선거,대의원회,총회,회계관리 등 노조유지 관련 업무에 대해서도 최소 범위 내에서만 유급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새 노조법은 노사정위원회와 국회 환노위를 거치면서 변질됐다. 당초 노조전임자 임금지급을 금지하는 게 원칙이었다. 그런데 노동 관련 학자와 정치인들의 손을 거치면서 일부 전임자에 대해 타임오프라는 형태로 전임자 임금을 보전해주도록 한 것이다.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에선 산업안전 노사교섭 고충처리 등 노사공동 활동에 한해 임금을 지원하도록 노동관련법이나 단체협약에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선진국에서 예외적,편법적으로 지급하고 있는 노조유지 관리 업무까지 타임오프 대상에 집어넣어 이의 인정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예상된다. 이달말 공익위원안을 확정키로 했던 근면위는 노동계의 반대로 국회 의견을 들어 내달 중순께나 최종안을 확정할 것으로 보인다. 국회를 거치면서 또다시 내용이 변질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윤기설 노동전문기자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