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은행원 제시카 심슨씨(34)의 급여명세서에는 한국 직장인에게는 없는 '슈퍼애뉴에이션(Superannuation)' 기여액과 임의 기여액이 적혀 있다. 국내 퇴직연금에 해당하는 슈퍼애뉴에이션 기여금은 회사가 급여의 9%를 내준 것이고,임의 기여금은 심슨씨가 스스로 원해 추가로 납입한 것.이 돈은 55세까지 찾을 수 없고,심슨씨 역시 미리 빼 쓸 생각이 없다. 그러다보니 20~30년씩 장기간 운용돼 장기투자의 이점을 고스란히 누릴 수 있다.

영국 호주 등 선진국들은 국민의 생애주기에 맞도록 펀드 지원제도를 갖춰 장기투자를 유도한다. 어린이펀드,학자금마련 펀드로 출발해 성인이 되면 자연스레 퇴직연금이나 개인퇴직계좌(IRA)로 이어진다. 우재룡 동양종금증권 투자컨설팅연구소장은 "선진국에선 24세에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60세까지 펀드로 돈을 굴리는 게 사회통념"이라며 "연금제도가 뿌리 내리면서 장기투자가 국민들 몸에 배어 있다"고 말했다.

◆영국은 어린이펀드 의무가입

영국 부모들은 자녀 학자금이나 주택자금 마련을 위해 어린이펀드인 '차일드트러스트펀드'에 가입한다. 영국 정부는 2005년 4월부터 이 제도를 도입했다. 어린이가 태어나면 정부가 250파운드(43만원)를 지원,펀드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

어린이펀드 가입자에겐 소득세 · 증여세 면제 등 세제 혜택이 주어진다. 연간 최대 적립금은 1200파운드(204만원)이며,만 18세까지 인출이 불가능하다.

어린이펀드의 투자 대상은 주식 채권 등 다양하며 운용상 발생하는 자본이득과 이자소득에 대해선 세금을 물리지 않는다. 김철배 금융투자협회 집합투자서비스본부장은 "세제나 각종 지원을 통해 자연스럽게 어린이펀드에 가입하게 하고 18세까지 인출 자체를 금지해 장기투자를 유도한다"고 말했다.

미국에선 학비 마련을 위한 법정 프로그램인 '529 플랜'이 있다. 주 정부나 교육기관에 의해 설정,운영된다. '529 플랜' 역시 자본이득과 이자소득을 비과세한다. 학비나 책값,기숙사비 등에 쓰면 이후에도 세금이 없다. 부모나 조부모가 자녀 한 명당 매년 '529 플랜'에 넣어주는 1만1000달러(약 1220만원)까진 증여세가 면제된다.

◆성년이 되면 퇴직연금

호주 슈퍼애뉴에이션은 퇴직연금의 대표적인 성공모델로 꼽힌다.

근로자는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며 자신에 맞는 기금을 선택할 수 있다. 연봉의 9%를 적립해야 하지만 스스로 판단에 따라 적립금(임의 기여금)을 늘려 대개 12~13% 정도를 낸다. 개인당 5만호주달러(약 5160만원)까진 평균 세율(30%)의 절반인 15%의 최저세율이 적용된다. 슈퍼애뉴에이션 적립금은 중도 인출이 엄격히 제한된다. 이를 위반해 인출하면 그동안 받은 세제혜택을 모두 토해내야 한다.

슈퍼애뉴에이션 가입률은 정규직은 100%에 가깝고 15세 이상 호주 국민 중 71%가 가입해 있다. 손성동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은 "작년 9월 말 현재 적립금은 1조1950억호주달러(약 1230조원)이며 2015년에는 2조호주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형별로는 퇴직급여가 고정된 확정급여형(DB)형보다 운용 실적에 따라 달라지는 확정기여형(DC형)이 압도적으로 많다. 투자 자산은 주식을 중심으로 채권 현금자산 등에 고루 분산 운용된다. 목표수익률은 7% 정도지만 지난 10년간(1999년6월~2008년6월) 연평균 수익률은 5.2%였다. 2000년대 초 IT(정보기술) 버블 붕괴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감안하면 양호한 수준이란 평가다.

미국은 노후자금 마련을 위한 퇴직연금 제도인 '401K'를 시행하고 있다. 적립단계에서 1만6000달러 한도로 비과세하며 연금 수령 때만 연금소득에 과세한다. 영국은 차일드트러스트펀드를 장년기의 개인종합저축 · 투자계좌(ISA)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연 7000파운드(1190만원)까지 ISA에 투자할 수 있으며 자본소득은 전액,이자소득은 20%까지 각각 비과세된다.

◆국내 연금제도 개선 서둘러야

국내 연금제도는 장기투자를 유도하기에 턱없이 취약해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국내 어린이펀드 설정액은 2조4000억원에 불과하고 퇴직연금펀드는 지난 1월에야 겨우 1조원을 넘었다. 미국 '529플랜'(100조원)이나 퇴직연금펀드(2200조원)와는 비교가 안 된다. 10년 이상 장기투자에 대한 혜택이 없다보니 투자자들이 장기연금 성격의 펀드에 가입할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지만 여전히 노후자금 마련은 각자 알아서 하라는 분위기다. 투자자들은 가급적 빨리 목돈을 만들려는 생각에 섣부른 시장 전망에 근거해 투자에 나서기 일쑤다.

삼성자산운용에 따르면 국내 적립식 펀드 평균 가입 기간은 2년이 채 안 되는 23개월에 불과하다. 하지만 성공 투자를 위해선 장기투자가 필수다. 1960년 이후 미 증시에서 10년간 투자할 때 1년 최대 손실률(평균)은 2.77%에 불과하지만 1년간 투자할 경우엔 40%가 넘는 손실이 날 수도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우 소장은 "정부가 연금제도에 손대지 않고서는 장기투자를 유도하기 힘들고 펀드시장의 쏠림과 대량 환매 문제도 근본적으로 해결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서정환 기자 ceose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