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드 가입땐 1시간 …해지땐 단 1분
"펀드에 가입하려면 상담 직원에게 한 시간 가까이 붙잡혀 있어야 해요. 가입 절차가 더 간편해져야 합니다. "(A자산운용 주식운용본부장) "당국이 판매보수를 인위적으로 낮춘 뒤부터 은행 · 증권사 직원들이 펀드 판매에 소극적입니다. 돈 되는 대출이나 랩어카운트 영업에 더 매달립니다. "(B자산운용 마케팅팀장)

최근 나흘 새 1조6680억원이 순유출되는 등 국내 주식형펀드 환매가 본격화하면서 자산운용 업계에서 볼멘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금융당국이 투자자와 업계를 보호하기 위해 내놓은 지원책이 오히려 환매를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과도한 환매를 막으려면 당장 세제 혜택보다 시장 현실을 고려한 판매제도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가입은 복잡,해지는 간단

8일 서울 여의도 D증권 영업부.상담 코너에서 주부 L씨가 직원으로부터 상품 설명을 듣고 있다. 적립식펀드에 가입하기 위해 영업점을 찾은 L씨 앞에 놓여진 서류는 모두 5가지.계좌개설 신청서부터 투자자정보 확인서,투자설명서 확인서,은행이체출금서비스 신청서가 나란히 펼쳐졌다. L씨는 초과위험선택 확인서에도 서명했다. 설문 결과 L씨의 투자성향 등급이 낮아 주식형펀드와 같은 고위험 상품에 가입할 때 추가로 필요한 서류라는 설명이 곁들여졌다. 펀드가 어떻게 운용되는지에 대해 몇가지 질문에 답변하고 상담을 마치니 50분이 훌쩍 지나갔다. 지난해 2월 자본시장법 시행 이후 일상화된 풍경이다.

영업 직원은 "펀드투자 경험이 많은 고객도 상품 가입 때마다 똑같은 절차를 거쳐야 한다"며 "투자자 보호라는 취지는 좋지만 판매 직원이나 고객 모두 불편을 느끼고 있다"고 지적했다. 증권사 PB팀 직원은 "복잡한 파생상품을 제외한 일반 펀드는 가입 절차를 간소화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많다"고 전했다.

하지만 환매할 때는 해지신청서 한 장만 작성하면 끝이다. 일부 증권사에선 전화만으로도 환매가 가능하다. 반면 신규 가입은 거쳐야 할 관문이 많아 '뉴 머니'가 유입되기 어려운 구조라는 게 현장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판매보수 인하로 신규유치 소극적

정부는 올해부터 신규 주식형펀드의 판매보수를 연 1%로 제한했다. 다음 달부터는 기존 펀드도 순차적으로 1% 이하로 낮춰야 한다. 투자자 부담을 줄여 펀드시장을 활성화하겠다는 것이 취지였다. 운용사 몫인 운용보수보다 판매보수가 지나치게 높아 불공평하다는 지적도 반영했다. 펀드 판매에 열을 올렸던 은행과 증권사로선 달가울 리 없다. 환매하겠다는 고객을 적극적으로 말릴 의지도 약해졌다.

그 사이 펀드에서 빠져나간 자금은 증권사 랩어카운트(랩)로 몰리고 있다. 랩은 증권사가 고객과 일임계약을 맺고 주식 채권 펀드 파생상품 등 다양한 자산에 투자하는 상품이다. 주식형펀드는 자산의 60% 이상을 주식으로 채워야하지만 랩은 시장 상황에 따라 투자금 모두를 현금성자산으로 보유할 수 있다. 게다가 증권사가 챙기는 수수료도 연 1~3%대로 주식형펀드보다 높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작년 7월부터 올해 1월 말까지 7개월간 국내 주식형펀드에서 7조5300억원이 순유출된 반면 랩 잔액은 3조6700억원 증가했다. 랩으로의 자금 이동은 최근에 더욱 속도가 붙고 있다. 랩 시장 점유율 1위인 대우증권은 2월 증가분이 849억원에 그쳤지만 3월에는 7837억원이나 늘었다. 한국투자증권과 신한금융투자도 3월에 나란히 2292억원,1979억원 증가했다. 업계 관계자는 "펀드를 환매하러 온 고객에게 랩을 권유하는 경우도 심심치않게 눈에 띈다"며 "펀드 보수를 낮춘 후부터 이런 경향이 뚜렷해졌다"고 전했다.

박해영 기자 bon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