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중소 PC · 모니터업체들은 '삼중고'에 시달렸다. 주력 제품인 데스크톱PC 시장은 노트북,넷북 등에 밀리는 데다 대기업의 가격경쟁력과 브랜드 인지도에 밀려 설자리는 점점 좁아졌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9월 글로벌 경제위기가 터지면서 중소업체들은 벼랑 끝까지 내몰렸다.

위기감이 고조되던 2008년 11월10일,이명박 대통령은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에서 '중소기업 현장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민간에서는 대기업 제품을 쓰더라도 공공기관에선 중소기업 PC와 모니터를 많이 사용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연 5000억원에 달하는 조달청의 공공물품 구매시장에서 중기 PC · 모니터 비중을 늘리라는 것.

하지만 중소기업의 반응은 냉랭했다. "이번에도 시늉만 내다 말겠지…"란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정부가 매년 조달시장에서 중소기업 제품을 우대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공공부문 PC · 모니터시장은 삼성전자,LG전자,삼보컴퓨터,HP 등 네 개 메이저 기업이 92%를 차지했다. 정부가 중소기업 제품을 써달라고 재촉해도 학교,지자체,공기업에서 "언제 부도날지 모르는 중소기업 제품을 어떻게 믿고 사느냐"며 메이저 제품만을 선호한 결과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조달청으로선 다급했다.

권태균 조달청장은 지난해 1월 주연테크,에이텍,현대아이티,현대컴퓨터,늑대와여우 등 중소 PC · 모니터 업체 사장 열 명을 불러모았다. "정부를 믿어주십시오.여러분 회사의 제품을 공공부문에서 많이 사도록 약속드리겠습니다. "

반신반의하던 중소 PC업체들은 조달청의 요청에 따라 지난해 3월 '정부조달컴퓨터서비스협회'란 협의체를 만들었다. 신승영 에이텍 사장이 협회장을 맡고,10개 중소 PC업체가 회원으로 참여했다. 협회 결성 후 중소기업들은 맨 먼저 AS망을 통합했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업체별 AS센터 751곳을 통해 10개 PC업체의 제품을 공동 수리하게 한 것.'기술력은 대기업에 뒤떨어지지 않지만 중소기업 제품은 AS가 잘 안 돼…'라는 선입관을 깨기 위해서였다. 8월에는 학교,공기업 등에 '회사 부도로 AS에 문제가 생기면 협회 차원에서 보상해준다'는 각서도 보냈다.

조달청도 힘을 보탰다. 권 청장은 여섯 차례에 걸쳐 11개 지방 조달청에 '학교 관공서 등에서 중소 PC업체 제품 구입을 늘려라'는 지시를 내렸다. 매주 한 차례씩 지역청별 중소기업 PC 구매실적도 점검하고 학교,공기업 등에 중소기업 제품을 써달라는 공문도 수시로 보냈다.

중소기업과 조달청의 연합작전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정부 조달시장에서 10개 중소기업의 점유율은 작년 1분기 6.9%,2분기 9.3%,3분기 9.0%,4분기 12.7%로 치솟았다. 연간 점유율은 2008년 4.7%에서 지난해 8.8%로 급등했다. 반면 4대 메이저 기업의 점유율은 88.6%로 떨어졌다. 메이저 업체 점유율이 90% 미만을 기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올해 1분기 실적은 더 놀랍다. 4대 메이저 기업의 점유율은 80.7%로 떨어진 반면 협회 소속 중소기업의 점유율은 16%로 높아졌다. 1년 만에 점유율이 무려 네 배 가까이 높아진 것.

예상 밖의 성과에 이번엔 중소기업들이 움직였다. 지난 1월 협회 회원사는 자발적으로 AS 개선방안을 내놨다. 전국 각지의 AS센터를 대상으로 '격려금 지급제도'를 도입한 것.수리 신고를 받고 빨리 출동하는 AS센터에 신고 건수당 1만~3만원의 인센티브를 지급했다. 이달 말부터는 메모리카드,CD롬 등 모든 부품을 공동 구매하기로 했다. 부품 공동구입으로 구매단가를 낮춰 공생(共生)의 길을 찾자는 취지에서다.

신승영 협회장은 "올해 연간 기준으로 공공부문 PC · 모니터시장 점유율을 20%까지 높이는 게 목표"라며 "이어 내년에는 25%,2012년엔 35%까지 점유율을 높일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명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