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열린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예정 시간보다 1시간10분이나 늦은 오전 10시10분에 회의를 시작했다. 금통위 의장인 이성태 한은 총재가 10시 넘어 한은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이 총재는 이날 오전 7시30분 청와대 비상경제대책회의(일명 지하벙커 회의)에 참석했다. 한은 총재로서 마지막 참석하는 회의였고,가계 부채와 기업 부채를 주제로 발표하기로 이미 정해진 터였다.

회의 참석자들은 이 총재가 작심한 듯 가계 부채 현황과 예상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짚어 나갔다고 전했다. 지난해 말 가계 부채는 734조원(가계신용)이고 사실상 개인으로 분류해야 하는 '소규모 개인기업'까지 합치면 855조원에 달했다. 한국의 가계 부채 비율은 150%로 선진국 가운데 최악인 영국(작년 6월 말 167%)보다는 다소 낮지만 미국(127%)보다는 높았다.

미국이나 영국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 이후 가계 부채가 줄어든 반면 한국은 최근 2년 사이에 103조원이나 늘었다.

이 총재는 우리나라의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이 40%대이고 연체율도 낮아 1980년대 말 일본의 버블 붕괴나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처럼 가계 부채 문제가 '금융회사 부실'로 이어질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소득 대비 부채가 많아 소비가 위축받는 게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가계 부채는 소비 위축으로 이어져 중장기적으로 성장잠재력을 떨어뜨릴 우려가 있어 적절히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 "자금이 비생산적인 부동산에서 흘러나와 기업 투자나 교육,의료 분야 등 고용을 확대할 수 있는 쪽으로 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가계 부채를 관리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은 정책금리 인상이다. 연 2.0%인 기준금리를 올려야 한다는 것이 이 총재의 지론이다. 그는 이날 금리 인상의 필요성을 직접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뜻은 분명히 전달했다.

이날 회의에는 윤증현 기획재정부장관과 진동수 금융위원장,김종창 금융감독원장도 참석했다. 이 총재의 주제발표를 듣는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고 한다.

정부는 LTV나 DTI(총부채상환비율) 등 여러 규제를 통해 가계 대출을 억제하고 있으며 부동산 가격도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는 입장이다. 가계 부채가 늘어나고 있는 사실만으로 금리 인상 등 본격적인 출구전략을 펼 때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소비·투자 등 경제 전반에 걸쳐 회복세가 나타날 때까지는 현재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는 진단이다.

정부는 가계 부채 문제를 벙커회의 주제로 채택한 것을 확대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재정부 관계자는 "오늘 자리는 현황을 점검하는 자리였고 별도의 대책을 마련하거나 내놓는 회의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금융위 관계자도 "이번 회의는 출구전략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이날 회의 참석자들에게 "가계 부채에 부동산 관련 비중이 큰 만큼 주택 가격과 건설경기 등 관련 부문의 동향을 유의해서 점검하라"고 지시했다. 또 "현재 가계 부채 수준이 금융불안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적지만 가계 부채가 늘어나는 속도에 대해서는 면밀히 모니터링, 가계와 금융권에 미치는 영향을 점검해 나가도록 하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발표를 마친 이 총재에게 박수를 보내며 "마지막까지 좋은 내용을 보고했고 지난 4년간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쳤다"며 "무엇보다 전례 없는 경제위기 극복에 한은이 큰 역할을 했다"고 격려했다.

한편 이날 열린 금통위에서는 은행 자본확충펀드 지원을 위해 정책금융공사에 대출해준 3조2966억원 가운데 후순위채 매각분 2030억원을 회수했다. 나머지 3조936억원은 1년간 대출을 연장하기로 했다.

홍영식/박준동 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