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누구나 입이 반쯤 나왔다. 고집 세기로 유명한 '금형장이들'은 "하던 대로 하면 되지 뭣 하러 쓸데없는 일을 벌이느냐"며 목소리를 높일 정도였다. 중견 금형(물건을 만드는 금속 틀)업체 삼진엘앤디가 2005년 초 생산 공정에 정보기술(IT)을 접목하기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지금은 불만이 쏙 들어갔다. 불과 4년 만에 금형 납기를 35일에서 20일로 43%나 줄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삼진엘앤디(대표 이경재)는 금형으로 TV용 몰드 프레임(플라스틱 틀)을 찍어 삼성전자에 납품한다. 삼성전자가 세계 TV 시장의 흐름을 주도하는 데 삼진엘앤디의 제조 혁신도 한몫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진엘앤디가 2008년 '삼성 상생협력 페스티벌'에서 최우수 협력업체 중 하나로 꼽힌 배경이다.

지난 18일 찾아간 경기 화성의 삼진엘앤디 공장은 보통 금형업체와 두 가지가 달랐다. 하나는 금형 제작 과정.직원들은 작업일지를 쓰지 않는다. 직원 간에 작업 진행 상황을 알리지도 않는다. 컴퓨터 모니터만 보면 450여명의 직원 모두가 금형 제작의 전 과정을 실시간으로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서다.

그 비결은 설계도면에 부착된 바코드.금형 1개를 만드는 데는 약 300개의 부품이 필요한데 모든 부품의 설계도면에는 바코드가 붙는다. 직원들은 작업 시작과 종료,비상 상황에선 무조건 전자센서기로 바코드를 찍는다. 그러면 해당 부품의 작업 진행 상황이 곧바로 컴퓨터 모니터에 표시된다. 박채희 금형사업부 과장은 "각각의 부품이 어느 정도 가공됐는지,불량이 생겼는지를 손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작업 속도가 빨라지고 비효율이 줄었다"고 설명했다.

설계도면을 그리는 작업도 색다르다. 30여개 협력업체에 일부 부품 생산을 위탁 중인 삼진엘앤디의 경우 설계도면을 바꿀 일이 수시로 생긴다. 과거에는 협력업체 직원과 직접 만나거나 팩스를 보내 변경 사항을 알려야 했다. 자연히 시간 낭비가 많고 정확한 의사 전달도 힘들었다. 지금은 온라인 설계 회의로 해결한다. 삼진엘앤디와 협력업체 설계팀이 동시에 같은 모니터를 보면서 설계 변경을 하기 때문이다. 중국 미국 멕시코 등 해외 생산공장과 설계 변경을 협의할 때도 마찬가지다. 정성묵 금형설계팀 차장은 "번거로운 출장이나 회의가 많이 줄어든 데다 설계도면의 정확도도 높아져 불량률이 낮아졌다"고 말했다.

삼진엘앤디가 생산공정을 'IT 기반'으로 바꾼 것은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결단이었다. 이경재 대표는 "납기 단축과 품질 개선을 게을리하면 중국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제조 혁신 방법을 고민하던 이 대표는 2004년 지식경제부와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이 'i매뉴팩처링 사업을 지원한다'는 얘기를 듣고 곧바로 도입을 결정했다. 정부 지원금 1200만원을 포함해 회사 사정에 맞게 IT를 접목하는 데 든 비용은 2억원가량.중소기업에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성과는 훨씬 컸다. 도입 전에 비해 연간 22억원 정도의 비용 절감 효과를 보고 있는 것.

삼진엘앤디뿐만 아니다. 우성정공 신한금형 아스픽 등 자동차 부품업체들도 i매뉴팩처링을 도입해 20% 안팎의 납기 단축 효과를 보고 있다. 성공 사례가 확산되면서 i매뉴팩처링 도입 기업은 현재 600여개사로 늘어났다.

이석우 생산기술연구원 박사는 "일본 도요타자동차가 한때 세계시장을 호령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가 1990년대 말 자동차 설계와 생산과정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하는 '디지털 매뉴팩처링'으로 신차 생산 기간을 24개월에서 13개월로 줄인 것"이라며 "국내 중소기업도 살아남으려면 IT를 활용한 제조혁신에 나서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

◆i매뉴팩처링=전통 제조업에 IT를 접목해 생산성 향상을 이끌어내는 제조혁신 전략.중소기업이 온라인상에서 기술 협업을 할 수 있도록 인프라를 구축하는 게 핵심이다. 'i'는 혁신(innovation),정보화(information),지능화(intelligence)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