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부분(部分)의 미학'을 추구해 왔다. 각 부분에서 자신의 소임을 충실히 수행하다보면 사회 전체가 조화롭게 발전해 나간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은 '물가안정'이라는 설립 목표에 충실해야 하고,기획재정부나 금융위원회 역시 자신의 존립 근거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는 논리다. 그 과정에서 충돌도 하고 타협도 하면서 접점을 찾아가는 것이지,미리부터 정부 입장을 반영해 통화정책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한은 직원들에게 여러 차례 강조해 왔다.

그런 이 총재에게 지금 상황은 '치욕'이다. 정책금리는 연 2%로 사상 최저치다. 지난달 물가상승률 3.1%보다도 낮다. 올해 하반기에 인플레이션(물가상승)이 닥치지 않을까 우려되는 상황이다.

1년 전쯤이다. 이 총재는 이런 얘기를 했다. "경기가 나빠지는 게 확실하니까 금리를 과감하게 내렸다. "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금리를 내리는 것은 쉽지만 올리는 것은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 매우 어렵다. 그 때가 오면 도와달라."

봄이 가고 여름이 지나면서 경기 회복세가 뚜렷해졌다. 지난해 9월 금융통화위원회 회의가 끝난 뒤 이 총재는 '4분기 금리인상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다.

하지만 정부는 싸늘하게 반응했다. "금리 인상은 내년에나 가봐야…"라며 발목을 잡았고,해가 바뀌자 "상반기 금리 인상은 성급하다"고 말을 바꿨다. 기자가 보기에도 정책금리를 인상하기가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이 총재의 임기는 오는 3월 말 끝난다. 채 두 달이 남지 않았다. 정책금리를 결정하는 금통위 회의는 딱 두 번 남았다. 금리 인상을 최근 검토했던 한국은행 실무진의 분위기도 '동결' 쪽으로 바뀌고 있다고 한다. 한국은행의 소임에 가장 충실했다고 자부하는 이 총재가 정책금리를 사상 최저치로 떨어뜨려 놓은 채 떠나야 하는 상황이다. 잠을 자다가도 눈이 번쩍 뜨일 이 총재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른다.

하지만 그리 원통해할 일은 아니다. 대중복지론을 주창했던 고 김대중 대통령은 국제통화기금(IMF)이 주도하는 개혁안을 받아들여 정리해고를 도입했다. 미국과 거리를 두려 했던 고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의 요구대로 아프가니스탄에 국군을 보냈다. 7% 경제성장을 공약한 이명박 대통령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낮은 성장률을 기록한 인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세상은 의지(意志)대로 굴러가는 게 아니다.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있다. 한은의 독립을 누구보다 강하게 원했고 그런 삶을 살아왔지만,실제로는 물가상승률보다 낮은 수준으로 정책금리를 떨어뜨렸고 재정부 차관의 열석발언권 행사 등 정부로부터 무수히 간섭을 받았던 이 총재의 지난 4년은 시대의 명령이고 전체의 뜻이었다.

못 다한 일은 후임자에게 맡기면 된다. 설령 후임자로 경기(景氣)를 중시하는 '비둘기'가 오더라도 상관 없다. 한은 총재가 해야 할 일은 이 세상이 부여한다. 가장 높이 나는 매를 꿈꿨지만 비둘기의 삶을 살아야 했던 이 총재의 숙명처럼 다음 총재는 비둘기를 갈망하더라도 가장 높이 날아야 하는 매의 운명을 타고날지도 모른다. 못 다한 숙제를 이 총재가 걱정할 이유가 없다.

현승윤 경제부 차장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