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 실학자 박세당 종가 12대 宗婦 김인순씨…"명절은 기쁜마음으로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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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어도 전통문화 지켜야죠"
"설에는 떡국 8그릇을 차례상에 떠 놔야 해요. 4대 봉사(奉祀)니까 고조부 내외분부터 증조부,조부,시부모까지 네 차례에 걸쳐 차례를 지내고 나면 미리 끓여 놓은 떡국이 퉁퉁 불어 있죠.시집와서 설마다 불어터진 떡국을 먹다보니 30년이 후딱 지나갔네요. "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197번지의 '서계(西溪) 종택'을 30년째 지키고 있는 김인순씨(56)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렇게 말했다. '서계 종택'은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자였던 서계 박세당(1629~1703)이 30여년간 은거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쳤던 곳.김씨는 이곳에서 반남 박씨 서계 문중의 12대 종손 박용우씨(서계문화재단 이사장)와 함께 종가의 전통을 잇고 있는 종부(宗婦)다.
엿새 뒤면 민족의 최대 명절인 설.종부 김씨의 설맞이 준비는 여느 집보다 훨씬 분주하다. 대대로 전해오는 종가의 내림 음식을 빠짐없이 준비해야 하고,넓디넓은 집안팎 청소며 차례 준비에 손님 챙기기까지….지난 5일 서울 근교에선 보기 드물게 종가를 유지하고 있는 서계 종택을 찾아 살림과 설맞이에 대해 들어봤다.
▼종택의 위치가 참 좋은 것 같습니다.
"탁 트인 앞으로 도봉산이 우뚝 솟아 있고,집 뒤로는 수락산 능선이 감싸고 있으니 풍광이 정말 좋지요. 서계 할아버지께서 여기에 집을 지을 때 도봉산까지 앞마당에 넣고 지었다고 해요. 여름에는 사랑채에 딸린 누마루 창 너머로 도봉산을 즐기고,겨울엔 사랑방 온돌 위에서 도봉산을 즐기셨다는데 지금 봐도 절경이죠.문밖으로 눈을 돌리면 도봉산 삼봉(만장봉,선운봉,자운봉)이 한눈에 들어오니까요. "
▼종택 소유지가 얼마나 됩니까.
"6 · 25 이후 유지 · 보수를 못해 허물어진 안채 터만 9900㎡가량이고,임야 · 전답을 합치면 모두 46만2000㎡(약14만평)입니다. 남들은 땅부자라고들 하는데 땅만 많으면 뭐하겠어요. 그린벨트에 묶여 있는 데다 2004년 서계문화재단으로 명의변경을 한 뒤로는 종부세까지 나오니 힘들어요. "
▼살림은 어떻습니까.
"사실 종손은 여느 집보다 두세 배는 벌어야 유지할 수 있어요. 제사다,손님 접대다 해서 돈 들어갈 일이 많거든요. 형편이 어렵다고 오시는 손님을 박대할 수도 없잖아요. 있는 찬에 숟가락 하나 얹더라도 나눠 먹는 게 종가의 인심이고 전통이니까요. "
▼손님이 많이 찾아오겠군요.
"서울 근교의 종가라고 해서 언론사에서도 자주 찾아올 뿐더러 서계 할아버지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해마다 50~60명은 찾아옵니다. 서계 할아버지 당대 모습대로 이 일대를 복원하는 방안이 작년에 석사 논문으로 나오기도 했어요. 잠깐 다녀가시는 일반인들까지 더하면 몇 천명은 됩니다. "
▼불편함이 많으시겠습니다.
"요즘 세상에 누가 편의시설도 제대로 없는 고택에 살려고 하겠습니까. 하루만 닦지 않아도 먼지가 뽀얗게 내려 앉는 마루며,일주일만 손을 놓으면 무성해지는 주변의 잡초며….잠시도 편할 날이 없어요. 서계 할아버지 봉분만 해도 관리할 잔디가 9900㎡거든요. 하지만 사람이 살지 않으면 종가가 아무리 웅장해도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사람이 살아야 종택이 살고,그러자면 불편은 감수해야죠."
▼'서계 종택'은 1999년 경기도 전통종가 1호로 지정됐는데 '고택 스테이' 등으로 활용할 방안은 없을까요.
"사실 자동차나 지하철로 손쉽게 올 수 있는 서울 근교에 이처럼 좋은 조건을 갖춘 전통 종가는 드물어요. 풍광이 뛰어난 데다 종택과 선산이 붙어 있고 넓은 땅도 있으니 말이죠.그래서 2004년에 서계문화재단을 설립해 안채,안사랑,바깥사랑,행랑채로 이뤄진 옛 모습을 복원하고 공방,상가 등도 갖춘 전통마을을 조성하려고 추진 중인데 행정기관의 허가가 나오지 않아서 손도 못대고 있어요. "
▼종가의 설 준비는 어떻게 합니까.
"대개 일주일 전부터 음식 준비를 시작합니다. 장은 그 전부터 미리 보기 시작하고요. 전통음식은 손이 많이 가므로 떡쌀은 언제 담글지,강정은 언제 할지 미리 계획을 세워 준비해야 돼요. 부꾸미 만들 찹쌀과 수수는 미리 갈아놓아야 하고,녹두도 반 말 해서 부침개를 만들어야죠.문제는 요즘 사람들이 이런 음식을 잘 안 먹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먹든 먹지 않든 음식은 합니다. 그래야 옛날부터 이어오는 내림음식을 후손들에게 전해줄 수 있을 테니까요. "
▼서계 종택의 독특한 설 풍습이 있습니까.
"다른 집들도 그렇겠지만 섣달 그믐날에는 서계 할아버지를 모신 사당을 비롯해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한 다음 밤에는 집안 구석구석에 등불을 환하게 밝혀둡니다. 새해를 신성하게 맞이하기 위해서죠.그리고 그믐날 밤에 사당에서 묵은 세배를 드린 다음 설날 아침에 다시 세배를 드려요. 묵은 세배는 한 해를 무탈하게 잘 보낸 데 대해 감사 인사를,설날 세배는 한 해를 시작하는 인사를 드리는 겁니다. "
▼지금도 무거운 놋제기를 쓴다면서요.
"사실 놋제기가 두 벌,목기와 스테인리스 제기가 한 벌씩 있는데 설에는 반드시 놋제기를 꺼내 씁니다. 처음(1980년) 시집왔을 땐 기왓가루나 연탄재로 놋제기를 닦는데 이틀씩 걸렸어요. 지금은 뜨거운 물에 제기를 담가 빳빳한 수세미로 닦으면 되지만 그땐 제기 닦는 게 큰 일이었죠.시제 때 산소에 교자상을 싣고 가려면 놋제기라야 해요. 가벼운 제기에 음식을 담으면 넘어지기 쉽거든요. "
▼일년에 제사를 몇 번이나 지냅니까.
"선대 열 분과 작년에 돌아가신 시아버님까지 기제사를 지내고,설 · 추석 차례에 10월의 시제까지 지내야 하니까 좀 많죠.제사를 꼭 지내야 하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부모를 보고 아이들이 배우는데 조상을 섬기지 않으면 그 아이들이 뭘 배우겠습니까. 그래서 '사윗감은 그 집 아버지를 보고,며느릿감은 어머니를 보라'는 말이 있잖아요?"
▼종가에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불편하지 않습니까.
"힘들다고 안 해도 되는 일 같으면 그렇게 하겠지만 그러면 '뿌리'를 포기하는 것이잖아요. 내가 안 지키면 작게는 가문이 없어지고 크게는 전통문화가 사라지니까요. 경제적으로 아무리 잘 산다 한들 문화 없이 정말 잘 살 수 있을까요?"
▼요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종부에 대한 관심이나 위상도 커진 것 같은데요.
"사실 60~70년 전에는 종부가 제대로 대접받았어요. 돌아가신 시어머니만 해도 '아씨'로 불렸거든요. 제가 시집왔을 때에도 동네어른들이 하대하지 않고 '종부 오셨느냐'며 종가 며느리 대접을 해주셨죠.종부한테는 연세 드신 분들도 '~해라' 하지 않았고 세배를 가도 그냥 받지 않고 맞절을 하셨는데 지금은 그런 풍습이 많이 사라졌어요. "
▼종손,종부로서 꼭 갖춰야 할 덕목을 꼽는다면 뭐가 있을까요.
"종부는 무엇보다 집에 사람 오는 걸 싫어하지 않아야 합니다. 누구라도 사람을 가리지 않고 대하는 게 종손 · 종부의 기본 덕목이거든요. 우리 집에는 지금도 누가 오면 꼭 반찬은 없어도 밥 먹고 가라고 해요. 예전처럼 밟 굶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있는 반찬에 수저 하나 더 놓으면 같이 먹을 수 있거든요. "
▼종부에게도 명절 스트레스가 있습니까.
"어차피 내 식구들 먹을 음식인데 기쁜 마음으로 준비하면 힘들지 않습니다. 식구들,친척들한테 뭐 맛있는 걸 해 줄까 생각해야지 남 탓하면 스트레스 받게 돼요. 명절 핑계로 맛있는 것 해 먹는다고 생각하면 즐겁잖아요?"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 서계 박세당은
실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서계 박세당은 31세 때 과거에 장원급제해 관직생활을 화려하게 시작했다. 예조 · 병조좌랑과 사간원 정언,사헌부 지평,암행어사,홍문관 학사 등을 두루 역임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그러나 옳은 일을 위해 직언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는 당쟁과 유학자들의 공허한 논란에 염증을 느끼고 39세에 수락산 석천동에 은거했다. 이후 이조판서,좌참찬,판중추부사 등에 임명됐으나 나가지 않았고,농사를 지으며 후학을 가르치고 '색경'과 '사변록' 등의 저술을 남겼다. 서계는 주자의 학설을 비판한 '사변록'이 이단서로 규정되고,둘째 아들 박태보가 인헌왕후의 폐출을 반대하다 유배 가던 중 객사하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야 했다.
이 때문에 서계는 만년에 자손들에게 남긴 '계자손문(戒子孫文)'에서 "늘 근신하고 천사람의 뒤에 종적을 감추라"며 다른 사람 앞에 나서지 말 것을 당부했다. 또 자신이 죽은 후에는 상례를 간소화해 무늬가 있는 비단을 쓰지 말고,3년 상식(上食)은 예가 아니므로 졸곡(삼우제를 지낸 뒤의 제사) 후에는 그칠 것 등을 강조했다.
또한 독서와 학문,교제를 충(忠)과 신(信)에 근본할 것을 강조하고 혹시 재물이나 아내가 꾸민 말로 형제 간에 다투는 일이 없도록 경계했다.
그 현장이 바로 서계 종택이다. 서계 당대에는 안채와 안사랑,바깥사랑,행랑채로 이뤄진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전통적 구조를 갖춘 곳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상당수 건물이 소실되고 안채마저 퇴락해 지금은 사당이 있는 영각과 사랑채만 남아 있다. 서계의 12대 종손 박용우 서계문화재단 이사장은 서계 종택 일대를 전통마을로 복원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한편 서계의 학문과 사상을 기리는 사업도 벌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