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개성 현릉에서 출토돼 2006년 국내에서 전시되기도 했던 고려 태조 왕건의 동상은 제왕의 동상으론 이례적으로 알몸 나체상으로 만들어져 있다.(신라시대 토우 정도를 제외하고 국내 문화 유산중 제왕,평민을 가릴 것 없이 알몸 조형물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앉은키 84.7cm로 성인 남자의 앉은키와 거의 같은 크기의 동상이지만 나체상 하면 떠오르는 ‘거시기’는 길이가 2cm 정도로 ‘왕건’과는 거리가 있게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대부분 정략결혼이지만 기록상 29명과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태조 왕건 누드상의 거시기가 특별히 작게 묘사된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32대인상의 특징중 하나인 마음장상(馬陰藏相)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또 서구의 나체 조각상에서 흔히 보이는 ‘초콜릿 복근’도 찾아볼 수 없는 밋밋한 뱃살의 아름다운 곡선을 보이고 있지만 누드인 것만은 분명한 동상이다.



고려초 광종대에 제작된 이 동상은 나체상에 옷을 입히는 양식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한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일대 군주 조각상으로는 유례를 찾기 힘든 특수한 사례라는게 학계의 평가다. 특히 고려가 초기부터 ‘점잖은’ 유교적 정치이념을 대폭 도입했던 점을 고려하면 예상밖 파격적인 양식이 아닐 수 없는데.
학자들은 국가적으로 가장 신성시되는 왕실 시조의 조각상을 나체상으로 만든 문화적 배경은 불교나 유교적 제례법의 영향을 뛰어넘는 전통적인 사회 기반이 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동상에 속옷과 겉옷을 입히는 나체상 양식은 불교나 유교 계통 조각상이 아닌 고구려 시대 이래 이어지던 토속제례 조각상들의 양식이라고 한다. 서울대 노명호 교수는 이에 대한 방증으로 15세기에도 목격된 개성 송악산 성모당(聖母堂)의 여섯 여신상이 옷을 입히는 나체상 양식이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조선초의 중앙관리였던 목격자가 적극 제지하는 신당지기를 억압해 신당에 들어가 보니 신상의 옷을 벗겨 햇볕을 쪼이던 상태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목격자는 여신상을 보고는 팔선궁(八仙宮)의 선녀가 연상됐다고 평을 남겼다. 이같은 전통은 현대에도 일부 살아남아 현대의 서낭당 신상중에도 몸통의 세부 묘사는 생략되도 기본적으로 나체 양식에 옷을 입히는 경우들이 발견된다고 한다.

이와 함께 『고려도경』 등에 따르면 1123년 송나라 서긍이 목격한 개경의 숭산신(崇山神)이나 동명왕의 서모인 유화의 신상도 옷을 입히는 양식이었다고 한다.노 교수에 따르면 고려사 등을 통해 고려시대 국가적으로나 민간에서 신성시되던 동명왕의 신상도 옷을 입히는 양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고구려가 망한 뒤에도 동명왕과 유화에 대한 숭배가 옛 고구려 지역에서 이어졌고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당시 민간에 폭넓게 퍼져있던 토속신앙적 전통을 적극 수용한 결과라는 설명이다. 한마디로 고구려 시대 이래 제례문화 전통을 이어받아 나체 제왕상이 나오게 됐다는 시각이다. 동명왕이 동명성제로 특별히 고려 건국지역 주민들의 숭배의 대상이 됐던 점을 고려할때 제왕의 초상으로서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왕건상의 착의형 나체상도 당시 시각에선 파격이 아닐 수 있다는 설명이다. 특히 이 동상이 철저하게 고려초기인들의 독자적인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왕건의 동상이 쓰고 있는 관이 제후들이 쓰는 원유관(遠遊冠)이 아닌 천자가 쓰는 통천관(通天冠)이라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는 게 노 교수의 분석이다.

최근 드라마와 일부 영화배우들의 영향으로 아닌밤중에 홍두깨격으로 ‘늘어진 뱃살 대신 초콜릿 복근’을 가지도록 사회적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 1100여년전 이상화된 제왕의 누드상에도 등장하지 않던, 기원을 찾기 힘든 초콜릿 복근이 현대 한국사회에 이상적인 신체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의 초콜릿 복근에 대한 압박은 어디서 어떻게 들어온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 원망스럽기 짝이 없다. 혹 이러다가 모두들 무덤에 초콜릿 복근을 ‘뽀샵’한 사진을 가지고 들어가는 시대가 오는 것은 아닐까.^^

<참고한 책>
노명호, 고려국가와 집단의식-자위공동체·삼한일통·해동천자의 천하,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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