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임성이 있고 기본적인 일본어를 구사할줄 알면 일본 투어 생활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몇 년 새 '한류 붐' 때문에 일본 골프장에서도 한국인을 보는 시각이 크게 달라졌어요. 한국 선수들이 올해 일본 투어에서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겁니다. "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투어의 '맏언니' 이지희(31 · 진로재팬)는 올해 JLPGA투어 34개 대회에서 한국 선수들이 두 자리 승수를 합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5일 서울 청담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이지희는 "그동안 만나기 어려웠던 지인과 친구들을 만나는 등 분주한 시간을 보내느라 귀국한 뒤 2주가 순식간에 지나갔다"며 아쉬워했다.
JLPGA 맏언니 이지희 "한류 덕분에 日 투어도 안방 같아요"

이지희는 작년 12월 초 열린 한 · 일전 우승 후 동료선수들이 주장인 그를 헹가래치는 과정에서 옆구리를 다쳤으나 지금은 다 나았다. "허리나 척추 · 목이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들 해요. 정말 다행이죠.덕분에 푹 쉬었습니다. "

이지희는 8일 일본을 거쳐 15일께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로 가 5주간 동계훈련에 나선다. 요즘은 하루 두 시간 필라테스(독일인 요제프 필라테스가 고안한 근육운동)를 하고,일본어를 담금질하고 있다. 친구들과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라고.

이지희는 지난달 27일 블루헤런GC에서 생전 처음으로 눈속에서 라운드를 즐기는 '이색 경험'을 했다. 드라이버샷을 한 뒤 페어웨이에서 볼을 주워들고 눈을 치운 뒤 다시 땅에 놓고 세컨드샷을 하는 식이었다. 스코어는 '공개 불가'라며 손사래를 쳤다.

"볼에 손을 대면 1벌타인데 로컬룰로 다 구제받았어요. 꽁꽁 언 그린의 바운스 계산도 힘들었고 퍼트라인을 따로 읽을 필요도 없었지만 무척 재미있었어요. 겨울에는 국내에서 라운드 기회가 없었는데 '겨울 골프의 묘미가 이런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1998년 KLPGA투어에 데뷔한 그는 2001년 JLPGA투어 무대로 옮겨가 일본에서 통산 12승을 거뒀고,특히 2003년에는 4승에 상금랭킹 2위를 하며 상승세를 구가했다. 하지만 우승 없이 상금랭킹 44위까지 곤두박질친 이듬해 골프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다.

"의욕도 상실하고 정신적으로 해이해진 상태였어요. '골프를 왜 치나'라는 회의까지 들었죠.그런데 신기하게도 몇 주 쉬니까 필드에 나가고 싶어지는 거예요. 그런 시기를 거쳤기 때문에 골프를 더 사랑하게 된 것같아요. "

이지희는 일본 무대 적응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대회수는 많았지만,이동거리도 미국 투어보다 짧은 편인 데다 음식도 입에 맞았기 때문이다. 요즘은 한류 붐을 절실히 느끼고 있단다. 데뷔 초기엔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대화가 진척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드라마 · 가수 등 한국에 대한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질문공세에 시달린다.

"골프장에 가면 캐디들이 '안녕하세요? 요즘 한국에서 비가 가장 인기 좋죠?'라는 식으로 인사를 해와요. 어떤 사람은 서울에 있는 식당이나 새로운 드라마 내용을 저보다 더 잘 알고 있어 당황스러울 때도 있어요. 일본 선수들이 소녀시대의 노래와 춤을 보여준 적이 있을 정도랍니다. "

올해 김영 안선주 등 10명이 JLPGA투어카드를 받아 한국선수 20명이 JLPGA투어에서 활약하게 됐다. 이지희는 "골프는 각자 스케줄에 따라 연습하는 개인 운동이어서 한국 선수들과 이야기할 시간이 많지 않다"면서도 "일본어 열심히 익히려고 노력하면 투어 첫해를 무난히 넘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학교(신동중) 1학년 때 골프를 시작해 올해로 구력 20년째가 되는 이지희는 이전까지는 상금왕,최소타수상 수상 등을 시즌 목표로 삼았지만 새해는 달랐다. "제가 하고 있는 것에 만족하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어요. 결과는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거죠.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한 타라도 줄이려고 노력하는 골퍼로 인정받으면 좋겠어요. 투어를 하다 보면 '정말 안 되는 날'도 있게 마련이지만,그런 날에도 한 타를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

이지희는 일본에 진출할 당시 서른 살까지만 선수생활을 할 계획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선수생활을 앞으로 3~5년은 더 할 것 같아요. 서른이 너무 빨리 찾아왔어요. 서른 살이 되면 은퇴할 줄 알았는데…."

김진수 기자 tru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