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 모델' 美RTP를 가다] 기업이 세율 정하는 '미국의 세종시'… 불모지가 지역경제 '젖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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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稅인센티브로 기업 후원… IBMㆍ시스코ㆍGSK 등도 입주
지난 4일 미국 동부의 '실리콘 밸리'로 불리는 '리서치 트라이앵글 파크(RTP)'를 방문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키 작은 나무들'이었다. RTP개발과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리서치트라이앵글재단(RTF)의 카라 루소 홍보담당은 "담배를 경작하다 버려진 땅을 연구 단지로 활용하기 위해 나무를 전부 베어 내고 다시 심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력(地力)이 다해 농사도 못 짓던 '불모지'가 계획적인 개발로 노스캐롤라이나 주를 먹여살리는 북미 최대의 연구개발(R&D)단지로 변모한 것이다.
RTP는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주도(州都)인 랄리와 인근 더램, 채플힐 등 세 도시를 잇는 삼각형 안에 여의도 면적의 3.4배 크기로 조성돼 있다. 최근 국토연구원이 세종시를 '과학비즈니스벨트'로 조성할 때 벤치마킹하겠다고 발표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과연 RTP의 기적이 한국에서도 재현될 수 있을까.
◆계획적 개발로 불모지서 캐시카우로
마침 이날 단지 내에서는 유전자 콩과 옥수수 등을 연구하는 농생명공학 기업인 신젠타(syngenta)의 입주 25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행사장에서 만난 제인 바크만 박사는"경제위기 얘기가 있었지만 우리는 최근 5년 동안 이곳 연구소 인원의 20%를 더 증원했다"며 "RTP 입주 이후 성과에 만족한다"고 했다. RTP 단지 내에는 현재 신젠타 이외에도 IBM과 글락소 스미스 클라인,시스코시스템,노텔 네트웍스 등 170여개 정보통신 및 생명공학 분야 대표 기업들이 입주해 있다. 이들이 RTP에 투입하는 연구비만 연간 28억달러(약 3조2200억원)다. 이 돈으로 정규직 4만2000명을 포함해 총 5만2000명이 채용돼 있다. 주 전체 고용인구의 22%다. 연구직 직원만 놓고보면 주 전체의 55%가 이곳에서 일하는 셈이다. 이들에게 임금으로 연간 27억달러가 지불되고 이들이 교육과 의료, 주거 등에 쓰는 돈은 지역 경제의 '젖줄'이 되고 있다. 덕분에 1950년대만해도 1인당 소득 기준으로 50개 주 중 꼴찌에서 두 번째였던 이 주는 이제 30위권으로 올라섰고, 최근 들어서는 성장 속도가 가장 빠른 지역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소득수준이 높아져 교육 및 거주환경이 좋아지자 인구가 계속 늘고 있다. RTP 지역 인구는 2000년 이후 30.2%나 증가했다. 미국 전체(7.8%)보다 4배나 높다. RTP 단지 내 농구장에서 만난 앤디 허린씨(IBM 엔지니어)는 "인구가 계속 유입되고 있어 2007년 말 이후 다른 지역 집 값은 조정을 받았지만 이곳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학이 선단을 이뤄 우수 인력 공급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재미한인과학자협회(KSEA)의 지청룡 회장(NC주립대 교수)은 "시의 적절한 계획과 이를 지속적으로 뒷받침한 기업과 대학, 정부 간의 유기적 협조 체계가 뒷받침됐다"고 지적했다.
RTP가 처음 조성된 1959년만 해도 대규모 연구집적단지가 드물었다. RTP는 비슷한 컨셉트로 개발된 아이오와주의 커밍스리서치파크(1969년)나 일본의 간사이사이언스시티(1986년) 등보다 훨씬 일찍 시작됐다. 선점 효과가 있었던 셈이다.
RTP가 성공한 두 번째 요인으로는 우수한 두뇌의 원활한 유입이 꼽힌다. RTP 인근에는 '남부의 하버드대'로 불리는 사립 명문 듀크대학(더램)과 엔지니어링 부문에 강점을 가진 NC주립대학교(랄리), 제약 및 화학 분야에서 손꼽히는 노스캐롤라이나대학(UNC채플힐) 등 3개 명문 대학이 포진해 있다. 이들 세개 대학에 투입되는 연구기금만 연간 16억달러(1조8400억원. 2007년 기준). 또 이들 대학을 포함해 RTP 인근 10개 대학 및 단과대학에서 총 11만7000명이 공부하고 있고 매년 1만5000명이 졸업한다. NC주에 있는 10여개 대학이 거대한 선단을 이뤄 RTP에 인력을 공급하는 셈이다.
프랭크 캐이즐러 UNC교수는 "일부 학교에서는 기업 인턴을 의무화해 산 · 학 · 연 협력을 강화하고 있고, 기업들은 이들 대학에 연구자금을 지원해 우수 인력을 채용하는 윈윈 체계가 구축돼 있다"고 말했다.
◆입주기업이 주도
주 정부는 RTP를 '셀프 택싱(self-taxing)'구역으로 지정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 정부는 1985년부터 RTP를 특정 지방자치단체에 소속되지 않도록 함으로써 세금 등에서 기업에 특혜를 줄 수 있도록 했다. 연구단지 관리기관인 RTF와 70여개 입주기업 대표들이 모여 지자체가 맡아야 할 단지 내의 환경 및 개발문제뿐 아니라 재산세율까지 정할 수 있게 한 것. 릭 웨들 RTF 대표는 "재산세의 경우 매년 한 번씩 RTF 이사진과 70여개 입주기업 대표로 구성된 협회에서 세율을 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RTP의 재산세율은 자산 100달러당 0.65~0.85달러로 인근 다른 지역(0.94~1.25%)보다 낮다.
스티븐 테일러 뉴욕주립대 교수는 "지역 명문대들은 고급 두뇌를 제공하고 기업은 이익을 교육 · 연구개발에 투자하며 주정부와 카운티,시 정부는 기업의 후원자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며 "이는 두뇌의 외부 유출을 막는 동시에 지역 경제 발전에도 한몫을 해 오늘의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더램(미 노스캐롤라이나)=박수진 기자 notwom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