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빠른 추종자(fast follower)에서 선두 주자(first mover)로….'

김반석 LG화학 부회장이 평소 임직원들을 향해 즐겨 쓰는 말이다. 우리나라가 그동안 하이테크 산업에서 일본 등 선진국을 뒤따라가는 형국이었다면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분야에서만큼은 해외 경쟁업체들을 제치고 시장 지배자로 도약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이를 입증하듯 LG화학은 올해 초 세계 최대 자동차 업체인 미국 GM과 전기자동차 배터리 공급계약을 맺었다. 최대 공급처를 확보한 만큼 일본업체들을 제치고 전기차 배터리 시장의 선두고지를 차지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관측도 나온다.

'위기는 기회'였다. 글로벌 경제위기를 맞아 연초 불안한 출발선에 섰던 국내 기업들은 올 한해 자동차,전자,석유화학 등 전방위 산업분야에서 예상밖의 수출 호조를 기록하는 등 글로벌 강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산업질서 재편과정에서 더 이상 추격자가 아닌 선도자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있는 국면이다.

◆해외 수출전선에서 '돌풍'

대표적 수출 기업인 현대 · 기아자동차는 올해 해외시장에서 더욱 입지를 다졌다. 지난 8월 현대 · 기아차는 미국 시장에서 처음으로 8.0% 점유율 고지에 올랐다. 현대차가 4.8%,기아차가 3.2%의 점유율을 보이며 미국시장 6위로 뛰어올랐다. 같은 기간 중국에서도 베이징 현대가 5만700대를 팔아 최다판매 기록을 세웠다.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 9월 유럽자동차공업협회(ACEA)가 발표한 신차 등록대수 집계에 따르면 현대차는 지난 1~8월 유럽시장에서 22만6000대를 팔아 전년 동기 대비 19.8% 증가한 실적을 올렸다. 유럽 소비자들의 기호에 맞춘 i10,i20,i30 등 소형차를 무기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린 것.현대 · 기아차는 지난 3분기 총 9003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리며 세계 자동차 업체 가운데 최고 수준의 실적을 기록했다.

삼성전자,LG디스플레이,하이닉스반도체 등 국내 전자 부품 기업들도 글로벌 경제위기를 오히려 시장지배력 확대의 계기로 삼은 사례다. 경쟁업체들이 주춤하는 사이 공격적 경영으로 시장 점유율을 대폭 확대했다. D램 시장은 말 그대로 한국 기업들의 독무대였다. 1년 새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의 세계 D램 시장 점유율이 8%포인트나 높아졌다.

석유화학산업도 올해 눈부신 실적을 거뒀다. 중국 수출이 활기를 띠면서 2,3분기 연속 어닝 서프라이즈(earning surprise) 국면을 이어갔다. 올 들어 매분기 사상 최고 실적을 거두고 있는 LG화학은 3분기 매출액 4조3643억원(연결기준),영업이익 7299억원,순이익 5430억원을 달성했다. 2차 전지 분야인 정보전자소재 부문도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대비 101.2% 증가했다. 한화석유화학의 3분기 실적도 만만치 않다. 매출액은 전년동기 대비 7.6% 감소한 7813억원이었지만 영업이익은 28%나 증가한 904억원을 기록했다.

◆기술경쟁력으로 트렌드 주도

국내기업들의 성과는 탄탄한 기술력과 위기를 거스르는 역발상적인 공격적인 투자가 발판이 됐다는 평가다. LCD업계의 경우 차세대 제품 경쟁에서 대만보다는 한발 앞서 있다. 삼성전자와 LG디스플레이는 최근 일본에서 열린 디스플레이 전시회 'FPD 인터내셔널 2009'에서 두께가 불과 3.9㎜에 불과한 40인치 TV용 패널,직하와 에지형 LED 패널의 장점만을 흡수한 '모듈라형 LED TV용 패널' 등 차세대 제품을 대거 선보였다.

국내 석유화학산업의 설비 운영 노하우는 이미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해외 석유화학공장들이 설비 트러블로 공장 가동이 자주 멈추는 데 비해 국내 공장은 100% 가동을 유지하고 있다. 삼성토탈의 대산공장은 세계적인 평가기관들로부터 공장운영 부문 평가 1~2위를 기록했을 정도다. SK에너지는 베트남 등에 정유공장 운영 노하우를 수출하고 있다. 설비 부문도 예외가 아니다. 국내 건설업체들이 중동,중국 등에서 잇따라 석유화학공장 신 · 증설 물량을 수주하는 낭보를 전하고 있는 것도 그만큼 기술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자동차부품산업의 기술력도 인정받고 있다. 도요타,폭스바겐,BMW 등 까다롭기로 유명한 해외 완성차 업체들이 품질 좋고 가격 경쟁력 높은 한국 부품업체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전선업체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초고압 전선에 강점을 가진 LS전선과 대한전선은 미국과 호주,러시아 등 선진시장에서 대규모 사업을 따내며 기술과 품질에서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확인하고 있다.

통신업체들은 유 · 무선 컨버전스(FMC) 기술을 잇따라 내놓으며 경쟁력을 키워나가고 있다. KT가 최근 휴대폰에서 인터넷전화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FMC 서비스를 내놓자 SK텔레콤도 FMC 서비스와 함께 집전화 요금으로 휴대폰 통화를 할 수 있는 유 · 무선대체(FMS) 서비스까지 출시했다. LG 3콤도 새해 4월께 FMC를 선보일 예정이다. 이와 함께 2차 전지,태양광 발전소재,LED 소재 등 신성장동력 부문에서도 일본 등을 앞서는 기술력을 발판으로 수출시장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다.

이정선 기자 sun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