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과장은 9일 새벽 눈을 뜨자마자 아들 머리를 짚어봤다. 행여 열이 나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지난주만 해도 떠들썩했던 신종플루가 한풀 꺾인 줄 알았다. 그런데 8일 저녁 뉴스에서 유명 연예인의 일곱 살 난 아들이 신종플루로 3일 만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슴이 철렁했다.

전국의 김 과장,이 대리는 처음엔 신종플루를 흔한 공포영화의 예고편쯤으로 여겼다. 사스(SARS ·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나 광우병,조류 인플루엔자(AI)도 비껴간 만큼 남의 일이려니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동료와 동료의 아이들이 신종플루로 고통받는 걸 보면서 '이거 나까지?' 하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손 씻기를 일상화하고 불요불급한 회의나 회식은 미뤘다. 기침 소리만 들려도 피하는 습관도 생겼다. '악플'보다 더 무섭다는 '신플'(신종플루의 약어)이 극성을 부리면서 김 과장,이 대리의 생활도 바뀌고 있다.

◆남자화장실에서도 "줄을 서시오"

서울 여의도 증권회사에 다니는 오모 과장(37)은 요즘 화장실에 갈 때마다 줄을 선다. 일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일을 본 뒤 손을 씻기 위해서다. 평소 세면대를 그냥 지나치던 사람들까지 '신플 정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손을 씻으려 하면서 남자 화장실엔 난데없는 줄이 생겼다. 식사 후 이 닦는 사람들까지 엉킬 때면 세면대에 자리 잡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그동안 화장실 줄은 여자 화장실에서만 볼 수 있었다. 신종플루 때문에 남자들까지 "줄을 서시오" 대열에 합류한 셈이다. 오 과장은 "100명 이상 근무하는 층에 남자 화장실을 달랑 하나만 지은 회사가 원망스럽다"면서도 "극장이나 버스터미널 같은 공중 화장실 세면대에서도 줄을 설 때가 많아 그러려니 하고 참고 있다"며 불만을 삭였다.

대기업에 다니는 임신 중인 신모 대리(32 · 여)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눈치를 본다. 가고 싶은 층의 버튼을 누르지 않고 다른 사람이 눌러주기를 기다린다. 행여 신종플루 바이러스가 태아에 침투할까봐 두려워서다. 같은 층에 가는 사람이 없으면 하는 수 없이 볼펜을 꺼내 버튼을 누른다. 뿐만 아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책상과 전화기를 위생 티슈로 닦고 또 닦는다. 남의 자리나 회의실 등에선 전화기도 쓰지 않는다. 태아 건강을 위해서라면 결벽증 환자가 됐다는 비아냥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긴다.

신종플루가 확산된 뒤 직장인들의 필수품도 바뀌고 있다. 손 세정제와 마스크 외에도 면역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비타민제와 홍삼은 꼭 챙긴다. 또 커피 대신 신종플루 예방에 좋다는 생강차나 모과차를 즐겨 마시고 있다.

◆회의 · 회식도 변했다

신종플루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회식.거의 종적이 사라졌지만 새로운 팀원이 나가고 들어올 때 환영식이나 환송식까지 거를 수는 없는 일이다.

대기업에 근무 중인 최모 과장(36)은 최근 있었던 신입사원 환영회 때 신종플루 때문에 바뀐 회식 문화를 실감했다. 누구도 술잔을 돌리지 않았다. 음식이 섞이는 게 싫어서 찌개도 개인적으로 시켜 먹었다. 삼겹살을 먹을 때는 자기 젓가락으로 뒤집은 것만 먹는 직원들도 눈에 띄었다.

1차가 끝난 뒤 누군가 "노래방에 가자"고 제안했다가 야만인 취급을 받았다. 호흡기를 통해 전염되는 신종플루의 특성상 마이크를 같이 쓰는 건 그야말로 "신종플루에 함께 걸리자"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유에서였다.

사내 행사도 뜸해졌다. 예비군 및 민방위 훈련도 사라진 마당이다. 조직 단합을 꾀한답시고 행사를 잘못 했다가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수 있다. 직원들을 한자리에 모아두고 실시하는 연수도 상당 부분 없어졌다. 팀 내 회의도 팍 줄었다. 그 자리는 온라인이 대체하고 있다. 집체 연수는 온라인 수강으로 바뀌었다. 대면 회의는 화상회의로 대체됐다. 메신저를 통해 필요한 용건만 주고받는 메신저 회의도 성행하고 있다.

◆신플증후군에 신플 진상까지

중견 제약회사에 다니는 양모 대리(29 · 여)는 최근 자가용 출퇴근족으로 변신했다. 어린 아이가 있어 대중교통을 이용하다가 신종플루에 옮을까 우려해서다. 물론 교통체증이 걱정되긴 했다. 그렇지만 아니었다. 출퇴근 시간만 피하면 차도 그리 막히지 않는다. 양 대리는 "회식 · 모임이 줄어든 때문인지 밤에는 차가 거의 막히지 않는다"고 전했다.

대형 유통회사에서 일하는 차모 과장(33)은 요즘 기침도 애써 참는다. 영 참기 힘들면 화장실로 달려간다. 얼마 전에는 그 좋다는 해외 출장도 반납했다. 잘못했다가 신종플루에 걸려 직장 내에서 '왕따'가 될까 두려워서다. 차 과장이 이러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한 달 전쯤 열이 조금 나서 병원에 다녀왔는데 동료들이 책상을 창가 맨 구석으로 옮겨놨던 것.차 과장은 "내가 쓰던 의자와 컴퓨터를 알코올로 소독하고 있더라"며 "무슨 에이즈 환자라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 동료들과 일주일 동안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며 불쾌해 했다.

신종플루를 악용하는 이들도 있다. 한 홈쇼핑 회사 여직원들 사이에 '진상'으로 유명한 L부장이 대표적인 경우다. L부장은 회식 때마다 은근슬쩍 여직원의 손을 잡고 러브샷을 강요해온 요주의 인물.최근에 회식이 거의 사라지자 다른 묘안을 짜냈다. 시간 날 때마다 여직원들의 체온을 재주겠다며 귀에다 체온계를 갖다대는 것이다. 싫다고 소리치기 힘든 신입 여직원들만 고르는 수완마저 발휘한다. 의사인 양 마스크를 착용한 채 여직원 귀를 만지작거리는 L부장의 모습은 말 그대로 꼴불견이다. 여직원들은 메신저로 "신종플루 귀신은 뭐하나"며 신플 악담을 나누고 있다.

◆'신플 홀리데이' 즐길 수 있어

신종플루로 뜻하지 않은 휴가를 '만끽'하는 직장인들도 적지 않다. 전염 속도는 독감에 비해 빠르지만 치사율은 0.03% 정도에 불과해 대부분의 신종플루 환자들은 큰 탈 없이 회복되기 때문이다.

박모 과장도 '신플 홀리데이'를 즐겼다. 박 과장은 최근 딸아이가 신종플루 의심 증상을 보이자 부랴부랴 병원으로 데려갔다. 아이는 다음 날 확진 판정을 받았지만 열은 바로 내렸다. 이튿날 박 과장은 회사로 출근했으나 인사부로부터 귀가 통보를 받았다.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신종플루에 걸리면 '가족 모두가 괜찮다'는 의사 소견서를 받을 때까지 출근해선 안 된다는 회사 방침에 따라서였다.

덕분에 박 과장은 주말을 포함해 총 5일을 쉴 수 있었다. 딸아이의 증상도 우려할 수준이 아니어서 금방 회복했다. 일주일 뒤 회사 사람들이 던지는 "딸이 신종플루로 효도했다"는 농담도 웃으며 받아넘길 수 있었다.

중견 제약회사 손모 대리(32)는 행사 불참 알리바이로 신종플루만한 게 없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손 대리는 "내키지 않는 초상집이나 결혼식에 안 갈 수 있는 핑계로 신종플루가 최고"라며 "'내가 기침이 좀 심해서'라고 얘기하면 모두들 '오지 말라'고 손사래를 친다"고 말했다.

정인설/이관우/김동윤/이고운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