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햅쌀은커녕 사과 · 배 딸 시기도 안 됐고,반소매 차림에 성묘 가고,에어컨 켜고 차례 지내고….'

지구 온난화로 인해 여름이 가기도 전에 오는 이른 추석의 풍경이다. '추석(음력 8월15일)을 양력으로 고정하자'는 농협경제연구소 제언은 '여름 추석'이 농산물 생산 · 유통 · 소비에 악영향을 미치는 데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최대 농산물 대목인 추석을 해마다 날짜가 바뀌는 음력 대신 양력 특정일로 고정하면 농업 불안정성이 해소되고 각종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분석이다.




◆지난해 경험한 '이른 추석'의 폐해

9월14일 추석을 맞은 지난해 사과 · 배를 재배하는 과수농가들은 판매 부진과 가격 하락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사과 · 배가 본격 출하되는 9월 하순 이후 가격이 예년보다 30% 이상 떨어졌기 때문.농수산물유통공사에 따르면 국내 배의 70~80%를 차지하는 '신고배'는 지난해 10월16~25일 상품(上品 · 10개) 평균 가격이 1만6000원으로 2007년(추석 9월25일) 같은 기간보다 37%,2006년(추석 10월6일)보다는 43%나 떨어졌다. 가격 폭락 원인은 '물량 과잉'이다. 배 생산량의 30%가량을 소비하는 추석 대목이 신고배 출하 이전에 지나버린 탓이다. 구연홍 이마트 과일바이어는 "수요가 집중되는 추석 대목에 물량을 소화하지 못하면 공급 과잉이 지속돼 가격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온난화로 인한 비용 증가

2000~2029년 30년간 추석 날짜를 보면 9월 초 · 중순이 모두 12번이다. 2~3년마다 '여름 추석'이다. 국립기상연구소에 따르면 지난 100년간 서울의 연 평균 기온은 2.4도 올랐고,여름이 길어져 가을이 시작되는 기준일이 9월11일(1908~1917년)에서 9월28일(1998~2007년)로 17일이나 늦춰졌다. 따라서 최근 10년간 2001년(10월1일),2004년(9월28일),2006년(10월6일)을 빼곤 모두 여름에 추석을 맞은 셈이다.

'여름 추석'은 생산 · 소비자 양쪽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과수농가는 추석에 맞춰 조기 출하하기 위해 성장촉진제 투여 등 불필요한 비용이 들어가고 소비자는 품질과 맛이 떨어지는 상품을 비싼 가격에 사야 한다. 유통업체들도 고온과 물량 부족으로 큰 홍역을 치른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추석이 빠른 해에는 높은 기온 탓에 과일뿐 아니라 냉동 · 냉장 유통되는 정육,수산물까지 타격을 입는 대신 썩지 않는 와인,인삼,공산품 등이 반사이익을 본다"고 말했다.


◆특정 요일로 지정하면 연휴 보장

보고서는 추석을 양력으로 전환할 경우 '여름 추석' 부담이 해소될 뿐 아니라 △국민경제 전체의 안정성과 생산성이 높아지고 △교통 등 사회비용을 절감할 수 있으며 △고정적인 연휴 확보로 추석의 가족 결속 효과를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김대현 농협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농민뿐 아니라 기업들도 연휴 대목의 변동성이 해소돼 생산성이 높아진다"며 "1분기 설 연휴보다는 3분기와 4분기를 왔다갔다 하는 추석을 고정하는 효과가 클 것"이라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다양한 측면을 고려해 농산물 수확이 마무리되는 시점인 '10월 넷째 목요일'을 가장 적합한 양력 추석일자로 꼽았다. 수확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데다 특정 요일로 연휴(주말 포함 5일)를 확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관습화한 차례문화와 배치

이 같은 주장은 음력 기준에 맞춰진 우리 민족의 오랜 명절 문화와 관습을 뒤엎는 새로운 발상이어서 상당한 논란을 불러올 전망이다. 특히 조선시대 이후 관습화한 차례 문화와 배치돼 일반 국민들의 정서적 거부감이 적지 않을 것이란 지적이다. 민속학계에서는 '추석 양력 전환' 주장에 대해 "논할 가치도 없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나경수 한국민속학회장은 "추석은 원래 추수 전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아 수천년간 이어온 우리 고유의 명절"이라며 "경제적 논리와 필요로 서양의 추수감사절처럼 바꾸자는 게 말이 되느냐"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 연구원은 "음력 8월15일은 단오나 정월 대보름처럼 세시풍속으로 계승하고 추석은 '귀성절' 또는 '성묘절'로 전환하자는 것"이라며 "추석의 역사적 명분이 약해지는 점은 중국의 건국기념일처럼 사회적 합의에 의한 보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