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국회 앞마당에서 열린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박영숙 미래포럼 이사장이 낭독한 추도사 전문이다.

김대중 대통령님, 우리의 선생님! 이제는 더 이상 얼굴을 뵈올 수 없고, 말씀도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우리와 정말 영영 이별하시는 것인가요?

대통령이 계셔서 든든했는데, 선생님이 계셔서 희망을 놓지 않았는데 우리 곁을 떠나신다니 승복하기 어렵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한두 번이 아닌 죽음의 고비를 기적적으로 극복해 내신 대통령님이시기에 병세에 대한 보도와는 상관없이 `대통령님을 한 번만 더 돌려주시라는' 이희호 여사님의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닿아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날 줄을 의심치 않고 있던 우리에게 서거의 비보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부족했나요? 아니면 하늘의 뜻이 있어서인가요.

대통령님의 서거는 우리에게 이별의 슬픔만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민족의 숙원과 사회의 고질적인 갈등을 풀어내는 화해와 통합의 바람이 지금 들불처럼 번지게 하는 것은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선물입니다.

오랜 고난의 세월이 있었기에 더욱 간절했던 둘이 종일 같이 있는 기쁨도 잠시, 그리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내 없이는 살기 힘들다고 하신 대통령님께서 어떻게 여사님을 혼자 두고 떠나실 수가 있습니까?

지금 지구촌이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세계인이 대통령님 영전에 꽃을 바치고 있습니다.

갈라진 남과 북의 산하가 흐느끼고 있습니다.

대통령님의 꿈을 키웠던 저 남쪽 바다가 울고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님, 그리고 선생님.

독재정권 아래에서 숨쉬기조차 힘들 때, 김대중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희망이었습니다.

모두가 침묵하고 있을 때, 총과 칼이 가슴을 겨누어도 님께서는 의연하게 일어나셨습니다.

숱한 투옥, 망명, 연금을 당하시고 늘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지만 뜻을 꺾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내일을 준비하셨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역사와 국민을 믿으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대통령님을 인동초라 불렀습니다.

가을에 익은 열매가 겨울 눈 속에서 더욱 붉었으니, 인동초는 봄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가장 험한 곳에 계셨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신념은 강철 같았습니다.

그리고 대통령님의 믿음대로, 예언대로 이 땅에 민주주의가 꽃피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 우리는 힘이 되어 드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고도 당신이 고마운 줄 몰랐습니다.

이제 살펴보니 당신의 빈자리가 너무 큽니다.

과연 누가 산보다 우람한 거목이 떠나간 자리를 채울 수 있겠습니까.

사회적 대 원로를 잃은 우리는 이제 나라의 큰일이 나면 어디로 달려가야 합니까.

국민의 눈물은 누가 닦아줄 것입니까.

당신께서 떠나니 이제 알겠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귀한 분인지, 당신의 삶이 얼마나 위대했는지 이제 알겠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한 번도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았던 진정한 민주투사였습니다.

온갖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우리 역사에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불굴의 정치인이었습니다.

사상 초유의 외환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구해낸 준비된 대통령이었습니다.

햇볕정책으로 남과 북의 미움을 녹여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낸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용서와 화해를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자신을 그토록 핍박하고 민주주의를 짓밟은 독재자들을 모두 용서하셨습니다.

`용서와 화해'라는 귀한 유산을 남기셨습니다.

진정으로 관대하고 강한 사람만이 용서와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대통령님은 버마, 동티모르 등 세계의 인권을 신장시키고 남과 북의 화해를 이뤄내 노벨 평화상을 받으셨습니다.

용서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시며 지구촌의 평화를 지키셨습니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당신의 피와 눈물 속에 피어났습니다.

당신께서는 민주주의의 상징이었습니다.

당신이 일구어낸 민주 사회는 분명 이전과는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진정 국민이 주인인 세상을 열었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하고, 국가지속가능발전위원회를 설치하고, 여성부를 신설하고, 정보고속도로를 완성하여 정보기술(IT)강국을 만들었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주변을 맴돌던 한국 외교를 국제무대 한가운데로 끌고나가 나라의 격을 높이셨습니다.

국민의 기초생활보장제를 도입하여 복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셨습니다.

재임 시절에 한류가 지구촌 구석구석에 흘렀고, 월드컵 4강의 함성에 세계인이 놀라고, 문화를 개방하여 국민의 자긍심을 높인 것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국민은 대통령님의 우리 문화에 대한 혜안과 인류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했던 식견을 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님, 그리고 선생님.

대통령님께서는 저 격동의 세월을 실로 쉬지 않고 달려오셨습니다.

퇴임 후에도 민족의 내일과 전 지구적 민주주의를 위해 정치와 세태를 꾸짖고 곳곳에 평화를 심었습니다.

저희가 이렇게 모여 대통령님의 업적을 헤아린다는 것이 어찌 보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 크기와 무게를 가늠조차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로 많은 것을 이루셨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님, 그리고 선생님.

`행동하는 양심이 되라'는 마지막 말씀을 새기겠습니다.

말씀대로 깨어 있겠습니다.

우리가 깨어 있으면 당신이 곁에 계실 것을 믿습니다.

당신과 함께했던 지난날들은 진정 위대하고 평화로웠습니다.

김대중이란 이름은 불멸할 것이니 이제 역사 속에서 쉬십시오.

대통령님, 당신의 국민들이 울고 있으니 하늘나라에서라도 저희를 인도해 주십시오.

김대중이 없는 시대가 실로 두렵지만 이제 놓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6월 25일 6ㆍ15 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들과의 오찬자리에서 매일 밤 이희호 여사와 함께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신다고 하시면서 목이 메어 말씀을 한참 잇지 못했던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대통령님, 벌써 그립습니다.

늘 국민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선생님, 이제 그 존경과 사랑을 당신께 드립니다.

지난날은 진정 고단했으니, 부디 편히 쉬십시오.

한경닷컴 박철응 기자 her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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