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조달러 조세피난처 비밀금고 열린다
이제 더 이상 '검은 돈과 탈세'가 설 자리는 없는 것일까.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등 세계 유명 조세피난처들이 잇따라 자국 은행들의 비밀계좌에 자금을 예치한 고객 정보를 공개하기로 결정하면서 글로벌 금융계가 술렁이고 있다. 총 7조달러(약 8650조원) 규모의 엄청난 자산을 주무르며 세계 전체 투자자산의 절반이 거쳐가는 곳으로 알려진 30여개 조세피난처들이 미국과 유럽 등 주요 선진국들의 압력에 줄줄이 백기를 들면서 앞으로 세계 금융 시장에 적잖은 파장을 몰고올 것으로 예상된다.

스위스 대형 은행 UBS는 12일 미국 법무부에 미국인 고객 1만여명의 비밀계좌 정보를 공개하기로 합의했다고 블룸버그통신 등 주요 언론들이 보도했다. 지난해 6월 미 국세청(IRS)이 UBS 측에 150억달러 규모의 탈세자금을 은닉한 혐의를 받고 있는 고객 5만2000명의 정보 제출을 요구하며 스위스 정부 및 UBS와 공방을 벌인 지 1년여 만이다. 리히텐슈타인도 전날 영국 정부에 리히텐슈타인 은행에 은닉된 20억~30억파운드 규모의 영국인 소유 비밀계좌 5000여개의 정보를 넘겨주기로 결정하면서 사실상 은행 비밀주의를 포기했다.

1960년대 이후 조세피난처로 막강한 파워를 자랑했던 카리브해 연안과 아시아 등지 국가들도 비밀금고의 빗장을 풀고 있다. 지난 3월엔 케이맨제도와 버뮤다제도,영국령 저지섬 자치정부 등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에 맞춰 자국 은행 고객 정보 제공에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싱가포르는 지난 6월 조세피난처 논란을 막기 위해 다른 국가들과 이중과세 방지협정을 통해 고객 정보 교환을 허용하도록 세법을 개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조세피난처 국가들이 이처럼 잇따라 꼬리를 내리는 이유는 경기침체에 따른 대규모 재정적자로 세수 확보에 비상이 걸린 각국 정부가 세제 투명성 제고를 목적으로 '조세피난처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주범 중 하나로 꼽힌 헤지펀드의 80%가 조세피난처에 거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도 제재 배경으로 꼽힌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미국에 본사를 둔 다국적 기업이 해외거점을 통해 활동할 경우 이전까지 제공했던 세금공제 혜택을 없애는 내용의 세제 개혁을 추진 중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지난 7월 양국 간 정상회담에서 고객 정보 공개에 비협조적인 조세피난처에 대한 국제적 규제를 강화하겠다는 뜻을 천명했다.

조세피난처들은 주요 선진국들의 이 같은 조치에 내심 반감을 나타내고 있다. 카리브해 국가들의 경우 조세피난 관련 사업 비율이 전체 GDP(국내총생산)의 30%를 넘을 정도로 나라 살림살이에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조세피난처들이 수출 제조업 및 IT(정보기술) 산업 육성에 나서고 있지만 여전히 불투명한 미래에 공포를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