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 탱크로 둔갑…유조선의 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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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익 노린 석유 사재기에 동원 100여척 운반보다 저장용도로
얼마 전 지중해 몰타지역을 방문했던 한 국내 정유사 임원은 바다 위에 떠있는 수많은 유조선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올해 초부터 기름을 가득 채운 유조선들이 하나둘씩 나타나더니 요즘에는 30여척으로 불어났다는 것이다. 그는 "대부분 닻을 내리고 몇 달씩 정박해 있는 배들"이라고 현지 사정을 전했다.
◆용선료 하락…원유 보관비용 저렴
이들 선박은 해외 거대 정유회사와 투자은행들이 사들인 기름을 보관하는 일종의 '해상 탱크'다. 정유업계는 이런 기현상이 올해 초부터 시작됐다고 설명한다. 작년 말 유가가 배럴당 36.45달러(두바이유 기준)까지 추락하자 향후 기름값이 오를 것에 대비,해외 석유업자들이 유조선을 동원해 앞다퉈 사재기에 나섰다는 것.
조선 · 해운시황 분석기관인 클락슨,깁슨 등에 따르면 아시아,북유럽,서아프리카 연안 및 멕시코만 등 전 세계 바다 위에 떠 있는 유조선은 100여 척에 이른다. 대부분 30만t급 이상 초대형 유조선(VLCC)들이다.
일반적 기름 보관 장소인 육상탱크가 아닌 유조선이 사재기 장소로 바뀐 것은 글로벌 경기침체 이후 물동량이 급감하면서 선박 운임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올 들어 VLCC의 월 운임은 배럴당 0.52~0.60달러로,경제위기 이전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으로 급락했다. 반면 육상탱크 보관비용은 꾸준히 상승,지난 16일 현재 배럴당 1달러 안팎으로 해상운임보다 훨씬 더 비싸다.
저금리도 기름 사재기를 부추긴 배경으로 꼽힌다. 원유 구입비용에 대한 이자 부담이 크게 떨어져 장기간 기름을 보관해도 경제성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석유 메이저인 셸(Shell)을 비롯해 투자은행인 JP모건,글로벌 석유거래업체(트레이더) 건보(Gunvor),비톨(Vitol) 등이 유조선을 동원한 기름 사재기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셸은 북서유럽 해안에 경유를 실은 유조선 10~15척을 정박시키고 있으며,JP모건도 몰타 해안에 대형 유조선을 띄워 270여일간 저장키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원유 현 · 선물값 차익 노린 '사재기'
업계에 따르면 이들이 사들인 원유는 6월 말까지 8000만 배럴에 달한다. 전 세계 원유 하루 소비량에 맞먹는 엄청난 물량이다. 경유 저장량도 6월말 현재 전 세계 하루 소비량(8300만 배럴)의 74%에 해당하는 6200만 배럴에 이른다. 이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원유 4조원,경유 5조원 등 총 9조원 이상의 자금이 투입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올해 상반기 원유값이 다시 뛰어오른 데는 이들의 공격적인 투자도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이들은 현물가격과 선물가격의 차이를 통해 이익을 극대화하는 투자기법을 활용하고 있다. 예컨대 6개월 혹은 1년 뒤의 선물가격이 현재 시점의 현물가격보다 높은 상태인 '콘탱고(Contango,선물 고평가)' 현상을 이용하는 것으로,원유를 구입한 뒤 곧바로 고평가된 원유가격이 형성돼 있는 선물시장에 되파는 방식이다.
정유사 관계자는 "기름값이 급락했던 작년 말이나 올초에 원유 현물가격은 40달러에도 못 미친 반면 6개월 뒤의 선물가격은 60달러 정도여서 큰 폭의 시세차익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이정선 기자 sun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