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지갑은 유리지갑이다. 얇고 투명한 데다 깨지기도 쉽다. 월급 및 수당,상여금 등 회사에서 받는 돈 대부분이 통장으로 들어와 감추기도 쉽지 않다. 더욱이 지금은 불경기다. 한푼이라도 아쉬운 주부들로선 행여 가장의 월급이 새지 않는지 눈에 불을 켜는 상황이다. 어설프게 연월차 수당,휴일근무 수당,연말정산 등을 꼬불치다간 얇디 얇은 비자금 통장마저 압수당하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김 과장,이 대리가 아니다. 술 좋아하는 고등학교 및 대학 후배를 챙겨야 한다. 가끔은 취미활동도 해야 한다. 아내 몰래 부모님 용돈도 만들어야 한다. 비자금 용처는 한도 끝도 없다. 그러다 보니 '비자금 크기는 자유의 크기이자 자존심의 크기'라며 비자금 만들기를 계속하는 김 과장,이 대리가 여전히 많다.

◆티끌모아 태산…전통형

제약회사 영업사원인 김영민 대리(35)는 스스로를 '복받은 케이스'라고 말한다. 연간 200만~300만원의 비자금을 손쉽게 만들 수 있어서다. 회사에서 수당 등 상당부분을 현금으로 지급하는 덕분이다. 매주 월요일이면 20만원을 영업활동비로 받는다. 휴대폰비,유류대 등도 현금이다. 휴가비를 현금으로 봉투에 넣어 지급하는 것도 전통이다. "창사 이후부터 선배들이 굳건히 다져온 비자금의 원천"이라는 게 김 대리의 설명이다.

대기업 계열사에 근무하는 송민석 과장(40)에게는 3년 전 만들어 둔 종합자산관리계좌(CMA)가 든든한 지원군이다. 연월차 수당을 지급받는 계좌를 CMA로 변경한 뒤 비자금의 보고가 됐다. 부서 경조사비나 회식비 갹출금이라며 빼돌린 돈이 CMA에서 조금씩 차오르는 것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난다. 송 과장은 "대부분 술값이나 주식 투자에 쓰고 남는 건 컴퓨터 게임 동호회 활동에 쓴다"며 "초등학교 여자친구들을 만날 때도 아내에게 알리기가 뭐해 비자금 통장을 활용한다"고 말했다.

◆해외계좌 · 이중통장에 가짜지출까지

금속자재 무역업체의 심모 과장(42)은 홍콩에 해외계좌를 갖고 있다. 회사 해외법인 계좌를 개설하는 일을 담당하면서 개인계좌 하나를 더 터놨던 것.물론 비자금은 많지 않다. 출장 때 남는 자투리 돈을 넣어두거나 해외 영업에서 달러로 받는 인센티브를 넣어 둔다. 원화로 돈이 필요할 경우 홍콩계좌에서 소액씩 송금해 온다. 그는 이 돈으로 해외여행을 즐긴다. 해외 출장이 잦은 업무의 특성으로 인해 부인의 '의심(?)'을 전혀 받지 않는 건 물론이다.

회사 내부직원과 공모(?)하는 것도 완전범죄를 꿈꾸는 직장인들의 전통적인 비법 중 하나다. 총무과나 경리과 직원과 친분을 터 놓은 뒤 명절 보너스나 급여 이외의 인센티브,출장비,식비,영업활동비 등을 별도 통장에 이체하는 방법이다. 이중통장을 직접 관리하는 사람도 있다. 공식 급여통장에 입금된 급여를 월급날 자신이 만든 비밀 급여통장으로 곧바로 이체하는 경우다. 입금자 이름을 회사이름으로 하면 부인을 감쪽같이 속일 수 있다고 한다.

선물로 받은 물품을 자신이 직접 산 것으로 꾸며 그 금액만큼을 생활비 통장에서 빼내는 '가짜 지출'법도 있다. 제약회사 한모 과장(38 · 여)은 "친정 엄마가 사준 옷을 남편에게는 생활비로 샀다고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며 "옷 금액에 해당하는 생활비를 내 통장으로 이동시키면 고스란히 비자금이 된다"고 말했다.

◆딱 걸렸어!…완전범죄는 없다?

대기업에 다니는 이경민 대리(34)의 비자금 관리는 결혼 직후부터 시작됐다.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직장동료,거래처에서 받은 축의금이 예상외로 짭짤했다. 300만원 가까운 현금은 의외로 사용할 곳이 많았다. 평소 눈여겨봤던 카 오디오도 바꾸고 친구들에게 기분도 내고….그가 믿는 것은 자동차 뒷자석 암레스트 박스.그만의 비자금 금고로는 딱이었다.

불행히도 이 같은 '범죄행각'은 6개월 만에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지난달 장모와 장인을 모시고 주말펜션에 가던 중 장인어른이 우연히 암레스트 박스를 열어봐 비자금이 들통난 것.이 대리는 현재 회사 월급통장과 카드를 넘겨주고 부인의 경제권에 완전 편입된 상태다.

컴퓨터 부품업체에 다니는 김영수 대리(34)도 얼마전 전과자(?)가 됐다. 다른 은행의 계좌를 통해 쌈짓돈을 관리해 왔는데 꼬리가 잡히고 말았다. 단서를 제공한 것은 우편물.거래가 없던 은행에서 날아온 마케팅용 우편물(DM)이 아내의 의심을 샀다. 김씨는 즉각 우편물 수신처를 '집 주소'에서 '이메일'로 바꿨다. 그렇지만 우편물이 갑자기 뚝 끊긴 것을 수상히 여긴 아내가 김 대리의 이메일을 통해 비자금 존재를 파악하게 됐다. 김씨는 "후배들 술 사주는 게 전부였다"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한 달 만에 겨우 아내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비자금 '전문 도우미'도 활용

증권사에 다니는 이영성 대리는 '비밀계좌'로 비자금을 관리하고 있다. 전 세계 부자들의 비자금을 관리해 주는 스위스 은행에나 이런 계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국내 은행들도 모두 이런 계좌를 개설해 주고 있다. 이 대리는 본인의 주거래 은행에서 '보안계좌'를 만들었다. 아내가 본인 아이디로 인터넷 뱅킹에 접속해도 이 계좌는 레이더 망에 잡히지 않는다. '보안계좌'는 인터넷뱅킹 폰뱅킹 모바일뱅킹이 원천적으로 봉쇄돼 있기 때문이다. 이 대리는 "은행창구와 현금자동입출금기(ATM) 등 자동화기기를 통해서만 거래할 수 있는 점이 오히려 보안 유지에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보험 영업일을 하고 있는 유민하씨는 좀 더 철두철미한 '시크릿뱅킹 서비스'라는 것을 이용한다. '계좌정보보호제도'라고도 불리운다. 보안계좌처럼 별도의 가입비도 필요없다. 짬을 내 은행 지점에 한 번 나가면 모든 게 해결된다.

◆비자금과 비상금의 차이

비자금이 꼭 죄책감과 갈등을 동반하는 건 아니다. 떳떳하고 고마운 비자금도 더러 있기는 하다.

중견 교육기업에 다니는 강모씨(37 · 여)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결혼 뒤에도 급여의 일부와 수당 등을 따로 모았다. 한 달에 20만~30만원씩 1년에 300만원가량 모였다. 그는 재작년 이사를 가면서 남편에게 500만원을 내놨다. "언제 이렇게 돈을 모았느냐"며 남편의 입이 귀에 걸린 것은 당연지사.

특히 시댁이나 친정 경조사에서 강씨의 비자금은 빛을 발한다. 그는 "비자금과 비상금의 차이는 나를 위해 쓰느냐,가족을 위해 쓰느냐의 차이"라며 "큰 지출이 있을 때 쓰기 위해 배우자 모르게 돈을 모아두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했다.

이관우/이정호/정인설/이상은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