産銀 민영화 '山으로'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 핵심 공약인 산업은행 민영화가 표류하고 있다. 금융위원회가 산은에서 분리되는 정책금융공사(KPBC)의 조기 가동에 우선 순위를 두면서 정작 산은 민영화를 위한 실행 계획은 가닥을 잡지 못하고 있다. 산은의 자산 분할과 인력 배분을 놓고도 산은 내부의 혼란이 커지고 있다.


◆정책금융공사,제2의 산은으로

금융위는 산은에서 분리되는 KPBC를 사실상 '제2의 산은'으로 조기 육성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29일 전해졌다. 이에 따라 정부는 현대건설과 하이닉스반도체,SK네트웍스 지분 등 값나가는 자산을 KPBC로 넘기기로 결정했다.

이 결과 KPBC의 자산 규모는 당초 계획보다 3조원 증가한 28조원으로 늘어났다. 산은은 현대건설과 하이닉스의 1대,3대 주주로 매각의 주도권을 갖고 있으며 지분 가치만 1조1000억원이 넘는다. SK네트웍스도 산은이 2대 주주로 12%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어 자산 가치가 4300억원 이상이다.

산은 관계자는 "KPBC가 제대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당장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이 필요하다는 금융위의 판단에 따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금융권에서는 KPBC의 정책금융 업무를 산은 민영화 완료 이전까지 산은에 위탁한다는 당초 계획도 바뀔 것으로 보고 있다. 또 KPBC가 민간은행에 자금을 지원해 간접적으로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온 렌딩(on-lending) 방식으로 운영하기로 했지만 중기 지원에서 녹색금융까지 주요 업무를 직접 챙길 것으로 전망된다.


◆산은 민영화는 뒷전으로

KPBC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과는 대조적으로 산은의 수신 기반 확충 등 산은지주의 기업 가치를 높이는 방안은 뒷전으로 밀려나는 분위기다. 민유성 산업은행장이 외환은행 인수 카드를 꺼냈다가 금융위의 경고를 받으면서 사실상 올스톱됐다. 진동수 금융위원장이 최근 "우리금융지주 지분을 빨리 파는 것이 좋다"고 언급하면서 산은 민영화와의 우선 순위도 뒤죽박죽된 상태다.

금융권에서는 KPBC 사장이 산은지주의 이사회 의장까지 겸임하도록 돼 있어 사실상 KPBC가 산은지주를 지배하는 기형적 구조가 될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산은 주변에서는 최근 KPBC 설립추진단 공모가 5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하면서 젊은 직원들이 대거 몰린 것도 산은 민영화가 위축되는 반면 KPBC의 위상은 강화될 것이라는 관측과 무관치 않다는 분위기다.


◆정책금융 기능 교통정리 필요

한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업무가 중첩되는 국책 금융회사들이 오히려 조직 확대를 위해 각개약진하는 양상"이라며 "KPBC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실제로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 통합은 물 건너갔으며 민영화 계획이 보류된 기업은행은 수신 기반 확충을 위해 우체국 금융을 인수하겠다고 나서는 상황이다. 시급한 우리은행 민영화는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금융권에서는 중첩된 정책금융 기능을 정리하지 않은 채 KPBC가 출범과 동시에 역할을 하면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라며 '도대체 이럴거면 산은 민영화를 왜 하느냐'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지금은 정부가 국책 금융회사들의 민영화 우선 순위와 중첩된 기능의 교통정리 같은 큰 원칙을 정해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이심기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