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프린스 전 씨티그룹 회장은 19일 서울 한남동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열린 한국경제TV 창사 10주년 세계경제금융 컨퍼런스에서 기조연설을 통해 “전통적인 월스트리트는 파괴됐다”고 단언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촉발된 금융위기로 인해 기존의 미국식 투자은행 모델이 존폐위기에 몰렸다는 진단이다.

그는 이어 “세계 경제사에서 지금처럼 폭 넓은 범위에서 파괴가 일어난 적은 없다”며 “여러 가지 위기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덧붙였다. 프린스 전 회장이 꼽은 금융위기의 다섯가지 원인을 정리한다.

1. 세계적인 불균형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동안 굉장히 많은 자본이 이동했다. 미국과 선진국은 전통적인 자금 제공국에서 채무국으로 전락했다. 반면 중국과 일부 개발도상국은 투자 대상국에서 신용 공여국으로 지위가 바뀌었다.

이로 인해 개도국에는 대규모의 미 달러화가 쌓이게 됐다. 문제는 이 자금이 미 국채 투자 등을 통해 미국으로 되돌아갔다는 것. 이 덕에 미국은 예산의 범위를 넘어서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과도한 소비의 원천이 형성된 것이다.

2. 통화당국의 무능함

지금의 위기까지 오는 동안 적절한 통화정책은 부재했다. 금리를 높여야 할 시점에 과감함을 보이지 못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오히려 금리를 낮춰서 미국 경제를 지탱하는 조치를 지속했다. 미국을 포함한 세계 경제의 회복세가 멈출까 두려워했다.

이런 정책은 자산가치에 엄청난 거품을 끼게 했다. 뒤늦게 금리를 조금씩 올리긴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경제를 망가뜨리지 않고 자산 거품을 제거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3. 뒷짐 진 규제당국

금융당국의 규제 역사는 1930년대 대공황 시절로 거슬러올라 간다. 그 당시 금융규제는 각 주별로 서로 독립적으로 만들어졌다. 루즈벨트 행정부는 이처럼 조각보를 잇듯이 여러 주의 규제를 얼기설기 엮어 금융시장을 컨트롤했다.

경제가 순항할 때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충격이 가해지자 이런 ‘조각보 규제’가 기능을 상실했다. 빠지고 겹치는 규제가 적지 않았다. 포괄적인 규제가 불가능했던 셈이다.

체계적인 규제는 마련되지 못한 반면 금융상품은 규제가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발전했다. 시장 규제에 반발하는 자유시장 세력도 금융위기의 단초를 제공했다. 자연스레 금융시장은 조금 더 규제가 가벼운 쪽으로 이동하게 됐다. 높아진 시장의 창의성과 느슨해진 금융규제가 만나서면 대폭발을 일으킨 셈이다.

4. 모기지 상품에 대한 무지

다섯 가지 원인 가운데 가장 큰 촉발원인이다. 규제 당국은 주택 모기지 상품에 대해서 무지한 반면 시장은 모기지 상품의 증권화에 열을 올렸다.

채권을 증권화하는데는 원재료가 필요하다. 금융시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원재료에 대한 수요도 폭증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는 이런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최적의 원재료였다. 내재된 리스크가 많아 금융상품 설계자들의 창의력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증권화가 가능한데다 규제나 감시도 적었다.

정치권도 환영했다. 저소득층도 ‘내집’을 마련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이유에서다.

증권화한 상품이 늘면서 이를 다루는 사람들에 대한 수요도 증가했다. 신용의 수준을 재고 대출을 일으키고 서류를 심사하는 사람들이 단기간에 급증했다. 이로 인해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도 다수 모기지 시장에 발을 걸쳤다. 금융위기가 잉태된 근본 원인이다.

5. 금융산업 종사자들의 단선적 사고

여러가지 수학적 기법을 통해 금융상품을 모델링하는 일이 잦아졌다. 수학적 기법은 기본적으로 과거의 경험을 기반으로 함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예측하는데 절대적인 무기라는 대접을 받았다.

사람들은 복잡한 수식을 통해 안도감을 느꼈다. 증권화된 상품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됐다. 여기에 신용평가기관들의 수학적 맹신도 한몫했다. 신용평가기관들이 이들 모기지 상품에 'AAA’ 등급을 부여하지 않았다면 이런 상품이 팔리지 않았을 것이다.

한경닷컴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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