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학 이론서나 강연에서 빠지지 않는 말이 있다. “긍정”이다. 긍정의 성공학이 보편화된 이 시점에서 감히 ‘긍정의 성공학’을 한번쯤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주식투자에 실패한 투자자에게 물으면, 십중팔구가 “또 성공할 줄 알았다”, “나도 남들처럼 성공할 줄 알았다”고 답한다. 누군들 성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아야할 시점에서, 곧 곤두박질 칠 장세에서 팔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아이러니 하게도 긍정, 낙관 때문이다. ‘예전에 성공했으니까’, ‘이번엔 꼭 성공할거야’, ‘나는 성공할 수 있어’ 하는 낙관론.

긍정의 부작용은 보다 광범위하다. 2000년을 전후해 미국에서는 ‘긍정의 성공학’ 열풍이 불었다. 너도 나도 ‘부자 되기’에 뛰어들었다. 심지어 일부 종교 단체까지도 성공 강연을 열어 성공 열풍을 부채질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점에서도 성공학, 부자학 코너가 특별히 마련될 정도로 성공학의 광풍은 강력했다. 모두가 긍정의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일각에서 미국 부동산과 신용금융이 너무 과열되었다고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긍정의 성공학에 취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냉정해야할 경제 전문가들조차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오히려 부정적이라며 긍정적으로 살라고 핀잔을 해댔다. 지금의 참담한 경제 한파는 성공 신화에 사로잡힌 그때 이미 예고된 재앙이었는지 모른다. 가히 긍정의 대역습이라 해도 크게 지나치지 않다.

그렇다면 이제 “긍정의 성공학”은 폐기해야할까.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라는 이야기에서 그 대안은 생각해본다.

베트남에서 월남전이 한창일 때, 미국의 짐 스톡데일 장군은 월맹군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다. 월남전은 미군에겐 지옥이었다. 미군 포로들은 전쟁포로의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밀림 속에서 고문과 질병으로 죽어갔고, 그 주검은 쥐도 새도 모르게 밀림에 버려졌다. 언제 석방될는지, 더 이상 가족을 만나볼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절망의 나날들이었다.

스톡데일 장군은 생사를 오가는 20여 차례의 고문을 당했다. 그는 수용소 포로 중에서 가장 높은 계급자로서 통솔책임을 느꼈다. 가능한 많은 포로들이 살아 나갈 수 있도록 모든 방법을 찾았다. 부하들에게 절망을 몰아내고 희망을 주기에 안간힘을 썼다. 그는 그렇게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무련 8년간이나 지옥 같은 수용소에 갇혀 있어야 했다.

마침내 극적으로 살아서 석방된 그에게 미 해군 역사상 조종사 기장과 의회 명예훈장을 동시에 수훈하는 최초의 3성 장군이 되었다. 한 기자가 장군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절망의 상황에서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지옥 같은 그 곳에서 풀려날 거라는 희망을 추호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장군의 말은 상식을 벗어나지 않은 답을 했다.
수첩에 ‘긍정’, ‘믿음’이라고 쓴 기자는 뻔 한 답을 예상하면서도 다시금 물었다.
“그러면 수용소에서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간단해요. 낙관주의자들이요.”
의외의 대답에 기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바로 직전에 자신이 한 말을 정면으로 뒤집는 지독한 독설이 아닌가. 혹시 비관주의자를 잘못 말한 게 아닐까. 어리둥절해하는 기자에게 장군이 설명을 덧붙였다.
“낙관주의자들은 상심하다 죽었어요. ‘이번 성탄절엔 나갈 수 있을 거야’낙관하던 사람이 성탄절이 지나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잠시 절망했다가 그들은 다시 긍정적으로 ‘부활절까지는 나갈 거야’하고 말합니다. 부활절이 지나고 다시 추수감사절, 추수감사절이 지나고 다시 성탄절을 기약합니다. 그러다가 상심해서 죽습니다.”
기자는 알 듯 말 듯했다. 한동안 같이 걸으며 침묵을 지키던 장군이 입을 열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어요. ‘우린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나가지 못할 겁니다. 그에 대비하세요.’”
“..........”
“이건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두 가지를 혼동하면 안 됩니다. 끝내 성공하리라, 결코 실패할 리가 없다는 믿음과 그게 어떤 것이든 눈앞에 닥친 현실 속의 가장 냉혹한 사실들을 직시하는 것을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스톡데일 장군의 이야기는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란 이름으로 전파되어 위기상황의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 자주 거론되었다. 대개의 사람들은 '스톡데일 패러독스'를 ‘합리적 낙관주의’, ‘합리적 긍정’이라고 정의하며 ‘맹목적 낙관주의’와 자주 대비시켜 강조했다. 그리고 최근 경제 위기를 합리적이지 못한 ‘맹목적 긍정의 성공학’때문 이라고 해설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스톡데일 장군의 말을 ‘합리적 낙관주의’로 받아들이는 데 다소 께름칙한 면이 있다. 낙관이나 비관이란 말 자체가 다가 올 결과에 관계없는 예측에 불과한 비합리적인 말이기 때문이다.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를 차라리 자신이 처한 작금의 현실을, 그리고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즉, ‘주제파악’이 보다 핵심적 교훈이라고 초점을 맞추고 싶다.

죄(罪)라는 한자를 파자하면 네 가지[四]를 부정한다[非]는 뜻이다. 네 가지는 다름 아닌 사주(四柱) 즉, 자기가 태어난 연·월·일·시(年月日時)를 말한다. 자기가 지금 서있는 곳과 처한 현실을 부정하는 것. 한마디로 주제파악을 못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진짜 죄라는 것이다.

긍정이 먼저냐 주제파악이 먼저냐 하는 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것처럼 정답이 없는 어리석은 질문 같을지 모른다. 하지만, 스톡데일 장군의 경험이 비추어본다면 그 결과는 천당과 지옥의 차이만큼 엄청나다. 긍정의 마음으로 잘 될 거라 스스로를 속이다가 참담한 현실을 직시하는 순간 밀려오는 상심에 까마득히 누적된 낙관의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이냐, 현실을 직시하여 주제파악을 한 지점에서 긍정하는 마음을 낼 것이냐.

주제파악은 사업의 성패뿐 아니라 인생의 성패도 좌우할 수 있다. 아니 주제파악은 이미 성패를 초월한 경지인지 모른다. 모르긴 몰라도, 평생을 걸고 수행하는 수행자들도 바로 이 ‘주제파악’을 위한 것으로 알고 있다. 밀물과 썰물이 오가듯 긍정과 주제파악이 날줄과 씨줄이 되어 순조롭게 밀고 당길 때, 인생은 비로소 한 폭의 아름다운 비단을 짜게 되는 것 아닐까. (hoo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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