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세계에서 장애와 어려움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 · 나무에서 물고기를 찾음)와 같습니다. 장애를 장애로만 받아들이면 거기서 헤어나기 어려워요. 장애가 왔다고 실의에 빠져 손놓고 있으면 죽은 사람이나 다름 없지요. 장애가 올 때를 기회로 여기고 이를 극복하면 더 잘 살 수 있게 됩니다. "

최근 덕숭총림 수덕사 산중총회에서 새 방장으로 추대된 설정 스님(雪靖 · 67 · 사진)은 23일 총림 선원이 있는 충남 예산 정혜사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경제위기로 어려움에 처한 국민들에게 위기를 기회로 삼으라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총림은 참선을 위한 선원과 경전교육을 위한 강원,계율 교육기관인 율원을 두루 갖춘 사찰로 총림의 최고 지도자가 방장이다. 덕숭총림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만공의 법맥을 올곧게 이어온 곳으로 설정 스님은 지난해 3월 입적한 원담 방장의 직계 제자다.

"사회가 어려우니 국민들이 신나고 용기와 희망을 갖도록 해줘야 하는데 신문을 보면 전직 대통령 이야기가 또 나와서 걱정입니다. 정치하는 분들을 어떻게 믿고 따라야 할지 마음이 아파요. 지금 정치하는 분들이 몇 년 뒤 또 저런 일을 겪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고요. "

산중에 있으면서도 세상 걱정으로 먼저 말문을 연 설정 스님은 방장 추대에 대한 소감을 묻자 "어깨에 큰 바위를 짊어진 느낌"이라고 했다. 근대선의 중흥지로서 수많은 고승들이 신자와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온 역사와 전통을 되살려야 하는 책임감 때문이다.

"승가가 옛 모습을 되찾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입산 출가해 스님으로 사는 것이 잘 먹고,잘 입고,자기 이익과 명예를 챙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고통에서 건져주기 위함이라는 출가정신을 회복해야 해요. "

출가정신 회복을 위한 조건으로 설정 스님은 철저한 신심과 공심(公心),원력을 꼽았다. 우주 삼라만상이 진여자성(眞如自性)을 갖춘 절대평등,절대자유의 위대한 존재임을 밝힌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겠다는 신심,출가자는 사인(私人)이 아니라 공인(公人)이므로 자신의 모든 것을 중생에 되돌리려는 공심,위대한 진리를 증득 · 실천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원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

"곧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옵니다만 외형적으로 등을 켜는 것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현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처님은 우리들에게 스스로를 의지해 진리의 등불을 밝히라(自燈明 法燈明)고 하셨어요. 부처와 중생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가 가진 위대한 심성을 위대하게 쓰면 부처요,옹졸하게 쓰면 중생입니다. 이런 믿음이 출가정신의 기본입니다. "

사람마다 가진 위대한 보물창고를 어떻게 개발해서 쓰느냐에 따라 부처와 중생으로 갈라진다는 얘기다. 설정 스님은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면 인격의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불교의 원형을 포기하는 중답지 못한 중이 자신을 망치고 불교를 망칩니다. 스님으로서의 자격,즉 승격(僧格)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어떤 직책을 맡으면 갈등과 시비가 끊이지 않습니다.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자기다워져야 합니다. 남편답고,아내답고,정치인다워야 신뢰가 생깁니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믿음이 없으면 아무 곳에서도 바로 설 수가 없고,힘을 모을 수 없습니다. "

1955년 원담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설정 스님은 범어사 봉암사 등에서 수행정진하다 30대에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원예학과를 졸업했다. 지금도 선농(禪農)일치의 가풍을 계승해 선방 근처 텃밭을 가꾸고 수덕사 스님들과 100여 마지기의 논을 일군 농사꾼이기도 하다. 1994년 조계종 개혁에도 참여했고 1998년 의회 격인 중앙종회 의장을 마친 이후에는 안거 때마다 봉암사,수덕사 선방에서 한 철도 거르지 않고 안거에 참여해왔다.
"중앙종회 의장을 마친 직후 췌장암에 걸려 죽을 고비를 맞았는데 그때 한 가지 결심한 게 있습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산다면 결코 편하게 살지 않겠다는 겁니다. 병고는 내가 전생에 지은 업 때문에 온 것이니 더 참회하고 정진했습니다. 그리고 어려움이란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이라고 믿고 더 열심히 노력하며 살겠다고 다짐한 것이죠."

설정 스님은 "밤이 가면 날이 밝듯이 삶에도 행과 불행이 맞물려 있으므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용기와 희망,자신감을 갖고 일하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며 격려했다.

수덕사=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