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한 길들여지지 않은 눈으로 세상을 보려고 합니다. 세상은 너무 많은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아요. 옷이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그래서 나를 발가벗겨 봤어요. 현대인의 고통,소외,외로움,분노,절규,위선을 도발적으로 표현하는데 인체만큼 좋은 소재도 없더군요. "

50대 스타 화가 오치균씨(53)는 자신을 모델로 한 누드 작품을 처음 공개한 자리에서 대뜸 "벌거벗은 인체는 고통의 질곡 속에서도 생존의 본능을 담금질해주는 힘과 에너지가 잠재돼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오는 16일부터 다음 달 10일까지 펼쳐지는 오씨의 개인전에는 1986~1989년 뉴욕 유학시절 광기를 뿜어내듯 3년 동안 그린 누드화 30여점이 걸린다.

오씨는 그동안 강원도 사북의 애수어린 탄광촌 풍경을 비롯해 서울,뉴욕 등 대도시의 소소한 일상을 담은 풍경화로 주목받은 '블루칩'작가. 그의 1991년 작품 '북악산 풍경'이 2006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1억4000만원에 팔려 '억대 작가'대열에 합류했고,2007년 6월(서울옥션)에는 50호 크기 작품 '길'(122.5×82㎝)이 5억원에 낙찰돼 자신의 경매 최고가를 기록했다.

오씨가 누드화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은 아내가 서울의 전 재산을 몽땅 사기당했던 1980년대 미국 유학시절.

"뉴욕 브루클린의 작은 아파트에 처박혀 광기를 뿜어내면서 저 자신을 그렸습니다. 모델을 구할 돈도 없어서 아내가 내 알몸을 사진으로 찍어 주면,이를 미친듯이 화폭에 그렸지요. 아마 그때처럼 생존 본능에 집착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

그의 누드화에는 대개 컴컴한 실내를 배경으로 형광색이 잔잔하게 흐르는 침대 위에 벌거벗은 남자가 사지를 잔뜩 웅크리고 있거나 누워있다. 검은 화면에 TV의 아크릴 빛이 면면히 뿜어져 나온다. 컴컴한 방에 켜져있는 TV는 바깥 세상과의 단절과 소통의 경계를 가르는 듯하다. 일방적으로 총알처럼 쏟아져 나오는 TV의 영상과 소리를 소통할 수 없는 도구처럼 묘사한 것도 이채롭다.

실제 오씨는 누드뿐만아니라 풍경화에서도 작품 구상이나 주제,기법을 이야기로 담아내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스토리텔링이나 설명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잡힌 구도에만 집중합니다. 저는 작업할 때 머리로 해석하지 않고 묻지도 않아요. 다만 가슴으로 느끼는 것만을 365일 줄기차게 스스로 충동질해서 그릴 뿐이지요. "

그는 고품격 에로티시즘과 에너지는 결국 통한다고 역설했다.

"예술적 정서라는 것은 철저한 자기 수양과 감각을 통해 얻어진다고 생각해요. 남성적인 에로티시즘의 단계를 넘어 고통의 순간을 예술로 승화시켰더니 에너지가 나오더군요. 에로티시즘만 배어있다면 작품이 아닌 '낙서'에 불과하죠.인간의 고통은 누드를 통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상(像)에 집착하지 않고 내면을 좇다보면 예술의 극치는 인간의 원초적인 에너지와 통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

'소외된 인간'을 주제로 한 이번 개인전에서는 1992~1995년 사이에 어머니,아내,딸 등 자신의 가족을 그린 그림 10여점도 함께 만날 수 있다. (02)2287-350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