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의 한 통신사업자는 지난해 전세기를 한국에 보냈다. 삼성전자 관계자들을 초청하기 위해서다. 휴대 인터넷 와이브로 도입을 위해 삼성전자와 미팅을 갖고 싶었지만 약속이 잡히지 않자 생각해낸 '묘책'이었다.

러시아 통신회사의 한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초 수원 삼성전자 본사로 날아왔다. 시간을 갖고 협상을 하자는 목적에서였다. 국내 기업들이 차세대 통신 서비스 분야에서 글로벌 표준 개발을 주도하면서 한국 기업을 '낮은 자세'로 모시는 해외 기업이 늘고 있다.

한국 기업이 선진 업체들의 기술을 도입해 양산경쟁을 벌이던 추격형 산업구조에서 탈피,차세대 기술 개발을 주도하는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삼성전자가 주도하고 있는 4세대(G) 이동통신 기술 와이브로(모바일 와이맥스)가 대표적인 예다. 4G 이동통신은 시속 120㎞로 달리는 차 안에서도 초당 100메가비트(Mbps) 속도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

4G 표준 시장을 둘러싼 다툼은 양강구도다. 노키아,에릭슨 등 유럽업체들이 주도하는 '롱텀 에볼루션(LTE)'이 한 축이다. 그 대척점에 '한국형 와이브로' 진영이 맞서있다. 형국은 팽팽하지만 실질적으론 와이브로 진영이 몇발짝 앞서 있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우선 기술 개발이 빠르다. 와이브로는 2006년 6월부터 국내에서 서비스를 시작했다. 반면 LTE는 내년에야 상용화가 예상된다. 응용 서비스 분야도 마찬가지다. 휴대폰을 신용카드처럼 결제 수단으로 쓸 수 있는 KTF의 'M-페이먼트' 모델이 세계 이동통신사업자 단체인 GSMA의 공식 표준으로 선정됐다.

빛을 내는 반도체 발광다이오드(LED)를 이용해 화질과 절전효과를 대폭 개선한 차세대 LED TV 개발도 국내업체들이 주도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달 초 중형부터 대형까지 LED TV 신제품 풀 라인업을 선보였다. 세계 빅3 TV 업체 중 처음이다. LG전자도 다음 달 LED TV 신제품을 내놓을 예정이다. LED는 당초 일본 업체들이 기술 개발을 주도했다. 하지만 삼성 계열사들만 LED 관련 특허 3000여개를 확보할 만큼 국내 기업들의 위세는 당당하다.

글로벌 특허 기술 분쟁에서도 승기를 잡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22일 일본 전자업체 샤프를 상대로 도쿄 법원에 제기한 액정표시장치(LCD) 특허 침해 금지 소송에서 이겼다. 국내 업체가 일본 법원에 이 나라 업체를 상대로 낸 특허 침해 소송에서 승소한 것은 처음이다. LG전자는 지난달 26일 월풀이 미국 무역위원회(ITC)에 제기한 냉장고 특허소송에서 최종 승소했다. 이로써 LG전자는 미국 냉장고 수출길이 막히는 위험에서 벗어났다.

통신업체 관계자는 "통신 인프라가 발달된 국내 시장 경험을 바탕으로 와이브로,모바일 결제,무선인터넷 등에서 국내 업체들이 표준 개발을 주도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표준을 선점하면 관련 장비,서비스를 개발한 국내 중소기업까지 해외로 나갈 수 있어 후방산업에도 상승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taehun@hankyung.com